[끝까지 잘림 없이 읽기]

1. 

 이번주에 1:1 PT를 시작했다. 이미 운동을 하고 있음에도 PT를 추가로 해야 하는지를 놓고 여름부터 고민하다 꽤 시간이 흘렀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 무료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힘을 주는 곳이라는 리뷰 답게 지난 이틀에 걸쳐 약 두시간 가까이 운동 목적을 살피고 앞으로의 몸을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할지 점검했다. 두시간 중 일부는 MBTI 검사를 하는데 쓰였다. 이 검사를 하는 이유는 1:1 PT를 앞두고 회원의 성향에 맞는 운동 지도 방식을 가졌거나, 회원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동기 부여를 해줄만한 강사를 매칭해주는 데에 있다고 했다. 여러 강사가 근무하고 있는 운동센터이므로 도입 가능할 시스템이기도 했다.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고 나니, 문득 '여기서 이렇게 MBTI가 튀어나올 줄이야'’ 싶었다. 성격유형검사 MBTI는 당초 상대방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최근 “난 여행할 때는 P고 일할 땐 J야"(여행은 즉흥적으로 하지만 생계는 계획적으로 꾸려간다는 뜻), “너 T야?”(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처단하고 싶다는 뜻), “저는 원래 I가 90%지만 사회화 되어서 E와도 얼마든지 잘 지냅니다.”(먹고 살기 힘드네를 에둘러 말하는 방식) 같은 다양한 용례로 이어졌다. 여전히 MBTI가 소비되는 이유는 그 알파벳의 모음과 그 중 하나를 떼어 말하는 방식이, 구구절절하지 않게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2.

 정치 서바이벌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 대한 첫인상은 '탈-MBTI'를 향한 거대한 몸부림 정도로 말하고 싶다. '더 커뮤니티'에 모인 12인은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이다. 참가자들은 사전 테스트를 통해 고유한 사상 점수를 부여받은 후 9일간 머무를 커뮤니티에 입주한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 웨이브

 "테스트는 4개 차원에 대한 참가자들의 점수를 측정하며 각각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각 성향은 주장이 강할수록 색깔이 선명해지고 주장이 소극적일수록 색깔도 희미해집니다."

_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소개 중에서

 입주 첫 날, 참가자들은 다른 이의 사상 점수를 모르는 상태이지만 상대방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대화를 통해 그 윤곽을 그려내고자 시도한다. 저 사람은 LFWO일까, REUC일까? 지난날 MBTI를 위시한 각종 유형별 테스트를 질릴만큼 접했던 한국인이라면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초반부를 보며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MBTI와 달리 사상 점수는 불특정 다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데 활용할 도구로는 다소 부적절한 구석이 있다. 나의 사상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나를 향해 너무나 많은 편견이 따라 붙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 날의 일정을 거의 마칠 즈음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12인 중 2인이라는 안내방송을 듣게 된 참가자들은 술렁인다. 내 앞에, 또는 내 옆에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서둘러 표정을 관리한다. 그러나 그들 안에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고 믿는 이가 두 사람이라는 점은 쓸만한 정보는 아니다. 이는 나머지 열 사람이 도려낼 수 있는 그들 안의 유일한 차이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정보는 그들이 있는 곳이 '획일화 된 커뮤니티가 아니다' 라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첫 날 저녁의 술렁임은 5일차 아침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커뮤니티 구성원의 아침 식사를 위해 백숙을 만든 '슈퍼맨'은 모두가 먹기 좋을 크기로 커다란 닭을 해체 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닭 목을 드시는 분도 있나?”, “왜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데 굳이 닭목을 먹을까?” 그는 닭목을 먹는 일을 "호불호가 아니라, 호가 너무 소수고 불호가 너무 대다수"인 경우로 정의내려 버린다. 우리는 슈퍼맨의 취향이 닭다리인지 닭날개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비단 닭목 뿐 아니라 더 커뮤니티 안에서 논의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입장을 취해야 할 때에, 슈퍼맨의 시선에서 바라보기에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너무 소수'가 있음을 암시하는 지점이다. 

 슈퍼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색깔이 뚜렷한 사람은 배척 당한다. 나와는 너무 달라서 그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빠르게 내려지기 때문이다. '하마'(11점)처럼 사상 점수가 너무 높은 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내에서 뚜렷한 먹잇감이 된다. '페미니즘 3점'인 페미니스트는 이곳에서 얼마든지 '내향 90%'이기 때문에 자립심이 현저히 부족한 히키코모리 같은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더 프로그램 사상 점수는 12점 만점으로, 이 중에는 11점이 한 명 있고, 4점은 두 명이 있다. 지금부터는 편의상 11점을 '극단 인간', 4점을 '중도 인간'으로 칭한다. 첫 번째 익명 채팅 토론 미션을 마친 중도 인간 '고애신'(4점)은 속마음 인터뷰 시간에 아연실색한다. “익명 채팅에서는 조금 더 '나는 이런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정확하게 표현하셨던 분이 계세요. 근데 그냥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할 때는 다들 중도적이었거든요. (웃음)"

'하마', '고애신'의 사상 점수 © 웨이브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 인간만큼이나 중도 인간 역시 속이 타들어간다. 사상 점수가 낮다는 건 그가 타인의 의견에 설득 될 여지를 두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그는 커뮤니티 내 다수의 자리로 초대되기 쉽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념이 발각 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프로그램 제목처럼 '사상검증구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상 점수가 타인에 의해 공개 당하면 커뮤니티에서 탈락될 수 있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입장을 분명하게 정하는 사람이라서(11점), 또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기조로 흐리멍덩해서(4점), 결국 같은 이유로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3.

 응원하는 참가자와는 별개로, 나는 전체 참가자들 중 '그레이'(8점)에게 몰입해서 이 프로그램을 본다. 그의 사상점수는 너무 낮지도 그렇다고 너무 높지도 않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그는 이 커뮤니티 안에서 취약하지 않다. 그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붙인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모든 거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게 흰색과 검은색의 세상이 아니라 저는 모든 사람이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진 그레이색. 다만 이게 짙냐 옅냐 이 차이인 것 같거든요.”

'그레이'의 사상 점수 © 웨이브

 남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추측할 수 없는 정도의 안전함을 어디에서나 보장받길 원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레이에게 빙의한다. 그레이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지레짐작하며 건네오는 말이 당황스럽다. 

- 다크나이트: “형님 금수저시잖아요.”

- 그레이: “왜 금수저라고 생각해요? 금수저라는 것의 기준도 뭐 명확하지 않고." 

- 다크나이트: “아 형님 너무 곱게 자라셨을 거 같아. 고생을 많이 안 하셨을 것 같아."

_ 다크나이트와 그레이가 담배를 태우다 나눈 대화(2화)

 이어지는 그레이의 말 속에서도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했을 것 같은 생각들을 발견하게 됐다.

“초반에 부각된 분들 외에 여기 모인 분들이 다채로울 거라는 생각인데, 그분들 위주로 가다 보면 이 안에서도 권력화, 세력화, 엘리트주의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고 뭐.”

_ 리더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되자 모두에게 하는 말(4화)

“마이클, 왜이렇게 흥분했어요? (…) 감정이 너무 얼굴에 드러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마이클과 한 팀이 되기 되게 힘든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에….”

_ 같은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마이클에게 하는 말(4화)

“불만 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 신경쓰나. 근데 여기는 조금 다르잖아. 12명 밖에 없어서 기분이 상해버리면, 자기도 우승하고 싶은데 ‘내가 왜 희생해야 돼?’ 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

_ 강압적인 리더십을 고수하며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슈퍼맨에게 하는 말(6화)

 대체로 그레이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가 큰 사람, 감정 조절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사람을 어르고 달랜다. 적당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다른 구성원들을 필요한 타이밍에 수면 위로 올리기도 한다. 그레이가 커뮤니티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프로그램의 룰 때문이다.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면 그는 상금을 탈 수 있다. 이를 위해 그에게는 신뢰받을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필요하다. 프로그램의 또 다른 독특한 룰은 마지막날까지 한 명의 승리자가 남을 수도 있지만, 여러명의 생존 또한 가능하다는 점이다. 입주 첫날 그레이는 '마이클'(5점)과 담배를 태우다 이런 말을 꺼낸다. "근데 우리가 만약에 정치적 성향이나 이런 게 너무 달라. 그래도 한 팀이 될 수 있어요 우리? 마이클이랑 나랑?" 그는 상대를 개조시키지 않고도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한다. 비슷한 시간에, '테드'(7점)는 남은 날들을 위한 가능성을 셈해본다. "진짜 다 사는 방법도 분명히 있고요. 전멸하는 방법도 있고."

 '더 커뮤니티'에서 전멸을 향해 가장 먼저 발을 옮기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레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선택은 남아 있는 구성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지만, 여기서 그에게 명시적으로 질타를 가하는 이는 '벤자민'(4점)이다. 즉, 이 순간에도 다수가 아닌 극단적인 소수만이 목소리를 내는 것 처럼 보인다. 최종화가 공개되기까지 두 편을 남겨둔 지금, 나는 거센 북풍을 몰고 온 바람이 아니라 끝없이 따뜻한 볕을 내리쬐는 햇빛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다는 옛 우화를 떠올린다. 마지막까지 남는 자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할까. 어떻게 이길까. 과연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이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