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사상 점수 © 웨이브
남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추측할 수 없는 정도의 안전함을 어디에서나 보장받길 원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레이에게 빙의한다. 그레이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지레짐작하며 건네오는 말이 당황스럽다.
- 다크나이트: “형님 금수저시잖아요.”
- 그레이: “왜 금수저라고 생각해요? 금수저라는 것의 기준도 뭐 명확하지 않고."
- 다크나이트: “아 형님 너무 곱게 자라셨을 거 같아. 고생을 많이 안 하셨을 것 같아."
_ 다크나이트와 그레이가 담배를 태우다 나눈 대화(2화)
이어지는 그레이의 말 속에서도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했을 것 같은 생각들을 발견하게 됐다.
“초반에 부각된 분들 외에 여기 모인 분들이 다채로울 거라는 생각인데, 그분들 위주로 가다 보면 이 안에서도 권력화, 세력화, 엘리트주의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고 뭐.”
_ 리더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되자 모두에게 하는 말(4화)
“마이클, 왜이렇게 흥분했어요? (…) 감정이 너무 얼굴에 드러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마이클과 한 팀이 되기 되게 힘든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에….”
_ 같은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마이클에게 하는 말(4화)
“불만 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 신경쓰나. 근데 여기는 조금 다르잖아. 12명 밖에 없어서 기분이 상해버리면, 자기도 우승하고 싶은데 ‘내가 왜 희생해야 돼?’ 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
_ 강압적인 리더십을 고수하며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슈퍼맨에게 하는 말(6화)
대체로 그레이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가 큰 사람, 감정 조절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사람을 어르고 달랜다. 적당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다른 구성원들을 필요한 타이밍에 수면 위로 올리기도 한다. 그레이가 커뮤니티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프로그램의 룰 때문이다.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면 그는 상금을 탈 수 있다. 이를 위해 그에게는 신뢰받을만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필요하다. 프로그램의 또 다른 독특한 룰은 마지막날까지 한 명의 승리자가 남을 수도 있지만, 여러명의 생존 또한 가능하다는 점이다. 입주 첫날 그레이는 '마이클'(5점)과 담배를 태우다 이런 말을 꺼낸다. "근데 우리가 만약에 정치적 성향이나 이런 게 너무 달라. 그래도 한 팀이 될 수 있어요 우리? 마이클이랑 나랑?" 그는 상대를 개조시키지 않고도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한다. 비슷한 시간에, '테드'(7점)는 남은 날들을 위한 가능성을 셈해본다. "진짜 다 사는 방법도 분명히 있고요. 전멸하는 방법도 있고."
'더 커뮤니티'에서 전멸을 향해 가장 먼저 발을 옮기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레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선택은 남아 있는 구성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지만, 여기서 그에게 명시적으로 질타를 가하는 이는 '벤자민'(4점)이다. 즉, 이 순간에도 다수가 아닌 극단적인 소수만이 목소리를 내는 것 처럼 보인다. 최종화가 공개되기까지 두 편을 남겨둔 지금, 나는 거센 북풍을 몰고 온 바람이 아니라 끝없이 따뜻한 볕을 내리쬐는 햇빛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다는 옛 우화를 떠올린다. 마지막까지 남는 자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할까. 어떻게 이길까. 과연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이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