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릿 [SUPER REAL ME] 음감회 후기 하이브 막내딸 음감회에 다녀왔습니다
: '아일릿(ILLIT)' 음감회 후기 |
|
|
ㅡ
아이돌 음감회에 대한 개인적 소회
지난 3월 14일, 하이브 사옥에서 진행된 하이브 신인 걸그룹 '아일릿(ILLIT)'의 데뷔 앨범 음감회에 다녀왔다. 하이브 소속 아티스트의 음감회에 초대받은 건 지난 해 엔하이픈 미니 5집 음감회에 이어 두 번째였는데, 케이팝 휀걸로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앨범 단위로 음악을 미리 듣는 기쁨 그 이상의 의미를 이번 음감회를 통해 찾은 것 같아서 이렇게 후기를 적어보게 됐다. 음감회는 아티스트가 내어놓은 결과물을 위해 지금까지 공개된 모든 개별적 요소를 재조합해서 '궁예'하고 '망상' 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의 성격을 가진 행사다. 즉, 음악과 퍼포먼스, 비주얼 아트, 마케팅 전략 등의 제반 요소를 '공식이 말아주는 해석'과 함께 떠먹는 시간이다.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기조 덕에 떡밥 기근이었던 90년대말 때부터 최소한의 단서로 케이팝을 즐기는데 최적화 되었던 나로서는 사실 이런 식의 감상 경험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공식 해석이 곧 정식 발매될 음반을 듣는 데에 더 도움이 되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왜냐하면, 아일릿은 데뷔를 앞둔 팀이므로 어차피 이전 앨범에서 보여준 콘셉트를 통해 이번 앨범의 방향을 유추한다거나, 케이팝에서 자주 쓰는 3부작 시리즈의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끼워 맞추면서 지금 이 앨범이 어떤 노선을 향해 가는지 등으로 사고하는 게 불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팀의 음악을 들을 때만 가능한 음반 감상 경험인지도 모른다.
ㅡ
<R U NEXT?>의 준비된 아웃풋
<R U NEXT?(알 유 넥스트?)>는 하이브 레이블 '빌리프랩'의 신인 걸그룹 멤버를 확정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2023년 여름 방영되었다. 그 해 9월 1일 파이널 라운드를 치른 후, 이번 음감회는 7개월(약 29주)만에 아일릿의 음악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다. 나는 음감회를 다녀온 후에야 <알 유 넥스트?>를 정주행하면서 뒤늦게 멤버들의 역량과 캐릭터를 파악하고, 멤버들 중에서 내 픽도 찾았다. 음감회 초대장을 받을 때부터 당일 여는시간에도 빌리프랩 측은 프로그램 종영 후 오랜 공백기 끝에 드디어 아일릿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정말 그런가? 7개월이 그렇게 긴 텀인가?' 싶었다. 그래서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파이널 라운드를 통해 데뷔조가 확정되고나서 실제로 그 팀이 데뷔하기까지의 소요 시간을 찾아보았다. 객관적으로 평균 대비 아일릿의 준비기간이 더 오래 걸린 건 사실이었다.
|
|
|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소리소문 없이 계속 되고 있다. 이제 내 주변을 보면 내 픽을 데뷔시키기 위해 아무도 문자 투표를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그 사이 실제로 해외 팬덤들이 투표에 손쉽게 참여하게 만드는 플랫폼이 다각화 된 탓이기도 하다. <알 유 넥스트?> 또한 평균 시청률은 0.7%로 저조했지만, 시청률과 무관하게 한 명이라도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라면 최종적으로 데뷔할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더듬더듬 매칭할 수 있게 되고, 그가 자신감을 가지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지점을 아주 대략적이나마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즉, 끊임없이 서바이벌 방식으로 아이돌을 원팀으로 데뷔시키는 이유는 현재의 프로그램이 망하더라도 미래의 팀은 살기 때문이다.
<알 유 넥스트?>는 하이브 소속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므로, 선배 아티스트의 데뷔곡을 부르는 미션이 눈에 띄었다. 연습생들이 총 3팀으로 나누어 엔하이픈의 Given-taken, 르세라핌의 FEARLESS, 뉴진스의 Attention을 소화하는 미션을 보다보면, 하이브에서 데뷔할 차세대 팀이 보여줄 음악에 대한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었다. (투바투의 ‘어머뿔’이 이 미션에 포함되었어도 좋았을 거란 바람이 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은 데뷔조 최종 멤버 선발 방식에서 논란을 남겼다. 파이널 라운드 당일, 글로벌 팬덤 투표에서 상위권에 있는 멤버를 최종멤버로 선발하고, 나머지 멤버는 최종 투표 순위와 무관하게 소속사 픽으로 선발하겠다는 기습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코치진은 “매라운드마다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 무대 외적으로 보여준 애티튜드, 스타성, 실력, 매력, 잠재력, 그리고 아일릿 전체 멤버 간의 조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자 한다”며 선정의 변을 덧붙였으나, 설득력은 부족했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특히 ‘멤버간의 조화'(소위, 멤버들의 그림체가 얼마나 비슷한가라는 비주얼적 조화, 개인의 단점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팀이 구성되었는가 라는 포지션 밸런스)를 고려하는 게 당연하겠으나, 이러한 상업적 논리를 공적으로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낸 처사라 뒤늦게 이 프로그램을 본 입장에서도 역시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팬덤 투표 1위를 차지한 원희 외에, 잔류자들의 최종 순위와 무관하게 하이브가 선발한 4인(윤아, 민주, 모카, 이로하)의 면면을 보면 소속사가 어떤 새로운 걸그룹을 만들고 싶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
|
© 빌리프랩
ㅡ
[SUPER REAL ME] 퍼스트 리슨,
음악이 좋다.
음감회에서는 아일릿 데뷔앨범 [SUPER REAL ME]의 4곡을 감상 했고, 작사 작곡에 참여한 주요 창작진, 장르적 특징, (있을 경우) 일부 가사의 모티프가 된 에피소드들을 소개 받는 시간을 가졌다. '음악이 좋다'라는 말이 성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음악이 좋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방식의 음감회를 열기도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 내게 '좋다'의 기준은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 되었을 때 한동안 자주 끼고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1번 트랙 'My World'
무난하게 기분 좋은 시작을 알리는 트랙이다. 하이브 방시혁 의장의 활동명인 ‘hitmanbang’이 모든 트랙의 크레딧에서 보이는 것 외에도, 특히 이 곡이 크레딧을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미 케이팝에서 걸출한(?) 결과물들을 내고 있는 창작진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Ellie Suh(153/Joombas): 에스파 ‘Drama’, NCT Dream ‘고래’, 비비지 ‘Untie’ 등 작사
-문여름: NCT Dream ‘맛’, 엔믹스 ‘Young, Dumb, Stupid’ 등 작사
-1월 8일: NCT U ‘일곱 번째 감각’, EXO-K ‘중독’, 카이 ‘Vanilla’ 등 작사
그 중에서도 Ellie Suh(153/Joombas)는 에스파 미니 3집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의 작사 작업에도 참여 한 바 있는데, 둘 다 제목에 “my world”라는 워딩이 들어가는데다 앨범 전반의 인상을 결정짓는 1번 트랙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에스파와 아일릿의 1번 트랙이 각기 어떻게 다른지 가사에 집중해서 비교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4번 트랙 ‘Lucky Girl Syndrome’
이번 앨범에서 나는 특히 마지막에 실린 ‘Lucky Girl Syndrome’이 가장 좋았는데, 지친 당신에게 힘이 반짝 솟구치게 하는 자양강장제 같은 존재가 되어주겠노라고 노래하던 전통적인 걸그룹의 긍정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노선을 걷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에 걸쳐 있는 걸그룹이 스스로를 어떤 'Girl'로 지칭하는가는 4세대 걸그룹부터 명확한 변화의 기조를 보이고 있다. 이 곡의 주요 모티프인 '럭키걸신드롬'은 지난 해 틱톡에서 크게 유행한 챌린지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사람이며,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테고, 온 우주가 내 위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는 걸 반복적으로 스스로에게 표현하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곡은 그런 믿음을 전파하는 음악이다. (이걸 K-버전으로 말하자면 나v는v내v가v정v말v좋v아(야~~~! 전방에 함성 2초간) 같은 게 아닐까.) 메시지 뿐 아니라 그냥 곡이 좋았다. 경쾌하게 쏟아져나오는 신스 사운드를 듣다가 그 날 처음으로 발가락을 흔들었다.
•3번 트랙 ‘Midnight Fiction’
‘Midnight Fiction’은 멤버들의 보컬을 오색의 파스텔로 끊임없이 겹겹이 칠하는 듯한 노래다. 이번 앨범의 아트워크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곡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일릿은 이번 앨범 아트워크에서 원색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곡 순서상, 타이틀곡을 먼저 듣고나서 이 곡까지 듣고나니 아일릿의 보컬 디렉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타이틀곡 ‘Magnetic’
가장 중요한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은 그룹 내 메인보컬과 서브보컬을 확연히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곡이었다. <알 유 넥스트?>를 보면, 지난 해까지만 해도 원희와 윤아의 보컬은 확연히 다르다. 이를테면,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었던 백예린의 ‘우주를 건너’ 미션에서, 원희는 꾸밈 없는 창법과 함께 독특한 음색을 보여주지만, 윤아는 맑고 단단하게 뻗어나가는 보컬을 보여준다. (이날 미션에 세븐틴 우지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몹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음감회에서는 'Magnetic'의 퍼포먼스 시안도 함께 보았는데, 멤버들의 표정이 무대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점에서 다양한 앵글과 카메라워킹으로 퍼포먼스의 킬링포인트를 포착하는 여러 비디오들보다도, 어쩌면 가장 고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가로버전 직캠 영상이 큰 뷰수를 올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시각각 표정 변화를 담을 수 있는 KBS 얼빡직캠 같은 게 이 곡에는 가장 최적화된 포맷일지도 모르겠다. 비주얼 면에서 이 음악은 줌아웃이 아니라 줌인을 한다.
|
|
|
SUPER REAL ME 하이라이트 메들리 © 빌리프랩
그러나, 먼저 들은 음악의 구체적인 생김새를 말로 설명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재, 4곡을 미리 들을 수 있는 '하이라이트 메들리 영상'이 공개 되어 있다. 하라메의 키치한 애니메이션은 로파이 플레이리스트 또는 시티팝 플레이리스트의 썸네일들 사이에서 마주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정도다. 이 영상은 래쉬 슬릭 마스카라 캠페인 애니메이션, Swarovski 및 Farfetch 디지털 콘텐츠 애니메이션 등을 작업해온 Mooncube가 프로덕션으로, 하이브 소속 허세련 님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했다. 음감회에서는 허세련 디렉터 님이 아티스트의 비주얼 크리에이티브와 관련 된 거의 모든 것을 들려주시는 순서도 있었다. 앨범 재킷, 뮤직비디오, 음악 방송 무대, 콘서트, SNS 홍보 콘텐츠 등 실물과 디지털에 쓰이는 여러 비주얼의 개별적 완성도만을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그 아트 콘셉트가 들쑥날쑥하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그걸 정리된 언어로 들을 수 있는 건 흥미롭고도 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아주 유용하게 느껴졌다.
|
|
|
ㅡ
그런데 넌 'SUPER REAL ME'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어?
끝으로, 아일릿의 데뷔 앨범 타이틀 "SUPER REAL ME"가 불러 일으키는 약간의 복잡한 마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음감회에서 브리핑한 바에 따르면, 아일릿은 글로벌 10대 팬덤으로부터 "같이 놀고 싶다"는 '동질감'과 아티스트로서의 '선망감'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팀이 되기를 지향한다. 음악과 무대로 어떻게 그 두가지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는, 아일릿이 데뷔 전부터 공식 유튜브 계정을 통해 꾸준히 자컨을 공개했고, 현시점에 틱톡을 활발히 굴리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하는 목표다. 나는 “주변에 이런 사람 있으면 태그" 틱톡 영상을 보면서 이 팀이 현재 포화 상태인 댄스 챌린지를 답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팬덤과 팬덤 바깥 누구에게나 참여를 일으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은 모두 미리 정교하게 짜여진 기획인가? 진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일릿의 틱톡은 멤버들이 툭툭 던진 "이런 거 해보면 어때요?"가 기획부터 실행까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장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평균 연령이 18세인 아일릿이 무대와 무대가 아닌 곳 어디에서든 'SUPER REAL ME'라는 메시지를 발신할 때, 리스너 중에서는 "진짜 10대는 그렇지 않아"라고 답할 10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친근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사람이 말하는 '나'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나(ME)'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이야기가 가진 한계이자, 가끔 이례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기적적인 가능성이다.)
10대의 고민이 10대의 끄트머리가 되도록 해소되지 않은 채로 '마음의 방에 살아가는 작은 사람'으로 남아서 20대와 30대, 어쩌면 그보다 더 멀고도 지난한 날들에 계속 데리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된다는 걸 30대인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10대가 로맨스도 우정도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크게 재지 않고 그저 꾸고 싶어서 꿈을 꿀 때, 그 과정에서 듣고 싶지 않은 꼰대와 기득권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 모든 상황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걸 보여주는 방식의 'SUPER REAL ME'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그럼 나도 지나간 시간을 긍정할 수 있고, 지금 10대인 청자도 이들의 음악에 몰입할 수 있을테니까.
|
|
|
© 빌리프랩
우리가 슈퍼 리얼한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과 정제 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을 온라인에 전시하는 일은 언뜻 보기에는 함께 가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요즘은 그런 것들이 함께 간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심리학 전문가들이 큰 소리를 낼 때, 케이팝 아티스트는 조금 다른 메시지를 전해도 된다. 그들은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싶은 나를, 혹은 가지고 있는 역량을 100% 드러내지 못하거나 의도치 않게 대중으로부터 오해 받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하지 않는(프로다움과 인간다움의 그 어려운 경계에서 조금 더 '인간다움' 쪽을 선택하는) 나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로부터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먼 존재를 향한 선망감 뿐 아니라 비로소 동질감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첫술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시간을 함께 쌓아가면서 '어떻게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거야?'를 순차적으로 경험하는 게 휀걸의 덕질인 법. 아일릿의 데뷔 앨범 [SUPER REAL ME]는 오는 3월 25일 발매된다.
|
|
|
월요일에는 대중문화를 큐레이션 하고
목요일에는 못다 한 이야기를 보냅니다.
지금까지 5,586분의 구독자와 함께하고 있어요.
COPYRIGHT © CONTENTSLOG. ALL RIGHTS RESERVED.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