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영사' with 문학과지성사 재와 연기와 기억의 노래
: 《부영사》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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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가 가는 비행기에서,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봤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 너머 저택에 살았던 루돌프 회스 부부의 이야기다. 이제껏 수용소는 외따로 고립되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 담장 바로 건너편에 딱 붙은 집이 있을 거라곤 가정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는 먼저 집 주인의 생활을 보여준다. 생활이란 다른 게 아니라 죽은 유대인의 코트를 착용하며 핏이 적당한지, 그들이 쓰다만 화장품이 자신의 피부 톤에 어울리는지 거울을 보며 확인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표정조차 짓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버려질 것들이라면 햇빛에 잘 말려 깨끗이 다리고 앞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부인 '헤드비히 회스'(산드라 휠러)는 그런 일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루돌프는 창문 너머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기둥이 풍경의 일부인 듯 받아들였고,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죽어가는 포로들의 비명을 듣는다. 그 연기를 바라보면서.
집의 뒤뜰,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부지에 정원을 가꾸는 데에 헤드비히는 모든 걸 쏟는다. 헤드비히의 취향과 그가 고용한 노역 일꾼들의 노동력이 교차하는 정원에는 어느새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무성해진다. 그는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엄마에게 잘 가꾼 정원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삶을 보여주고, 아이들에게는 여름맞이 물놀이라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그러나 헤드비히의 정원 그리고 하늘은 목가적이다 못해 마치 어도비 포토샵으로 채도, 명도, 색상의 추를 극단적으로 옮기며 색 보정을 한듯 부자연스럽다. 너무나도 선명하고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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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 A24
이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설 《부영사》(문학과지성사, 2024)의 주인공 '장-마르크 드 아슈(부영사)'가 바라보는 하늘과는 다르다. 부영사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극 중 배경보다 몇 해 앞선 1930년대 인도의 수도 캘커타의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부임 중이다. "아침마다 병든 하늘의 상태는 캘커타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백인들이 깨어날 때 그들을 음울하게 만든다. 오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그가 그렇다. 그는 관저의 발코니로 나간다."(p.34) 그는 이런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한 후, 출근하기 위해 10분여간 갠지스 강을 따라 걸으면서 '웃음을 흘리는 문둥병자들'을 스쳐 간다. 지금은 그저 지나치기만 할 뿐이나, 부영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또 원한다.
2.
처음 와 본 동네에서 나는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아이폰의 '건강' 앱은 한 시간 단위로 걸음 수를 분절해서 기록해주는데, 그날 오후 6시부터 7시 사이의 나는 약 6,140걸음을 걸었다. 이동거리가 얼마나 길었는가보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게 왜 그런지 설명하기란 힘들다. 나는 걷기의 효능 같은 것이나 목적지로 가는 최적화된 경로 따위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를테면, 《부영사》는 "뿌려진 걸음걸음이 뿌리를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이는 1930년대의 캘커타를 걷는 열일곱 살 여자의 움직임을 묘사한다. 정처 없이 걷는 2024년 어느 날의 나는 발바닥의 땀과 온몸의 뻐근함을 느끼다가 걷기로 작정한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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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 문학과지성사
고향으로부터 쫓겨난 소설 속 여자가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꽤 참혹하다. 발이 편한 경량 운동화를 신고 걸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맨발이다. 결국, 여자가 도착한 곳은 ‘새들의 평원’이라 불리는, 그 지역의 첫 번째 백인 초소다. 자신이 본능적으로 필요로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대는 백인들이라는 판단이 선다. 거기에는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또는 스스로 "받아들인 고통과 함께 그의 무지가 멎기를 바라는 한 젊은이"가 섞여 있다. 그는 부영사가 매일 10여 분간 따라 걷는다는 그 갠지스강가에 자리를 잡는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누가 자신을 멀찍이서 두려움을 안고 바라보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여자가 도착한 캘커타는 "그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무관심의 깊은 구덩이"이자 모두가 권태, 더 정확히는 "거대한 포기의 감정"을 느끼는 곳이다. 날씨는 "하도 습해서 하룻밤 새에 피아노의 조율이 틀어"질 정도다.
참을 수 없이 무더운 지역에 머물고 있는 부영사의 사정이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직 전에 잠시 지방 발령을 받았다고 해두는 게 좋겠다. 이전에 부임했던 라호르 영사관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켰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지 저는 지금, 라호르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득력 있게 보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저의 상황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자 합니다."(p.42)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저에 머무르고 있는 백인들은 부영사의 유년시절과 그의 전적을 궁금해하는 걸 넘어 끊임없이 그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당신 같은 인물은 자리에 없을 때만 우리의 관심거리요." 따위의 말을 당당하게 한다. 뒷담화를 행했음을 당사자 앞에서 인정하는 셈인데, 루머 양산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영사 주변에는 남은 음식을 캘커타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하는 '안-마리 스트레테르' 같은 사람도 있지만, 보호 철책에 둘러싸여 그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들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집 안에 칩거하는 사람의 흰 피부를 지니고 있다. 그녀들은 살인적인 햇살을 피해 겉창을 닫고 산다. 인도에서 그녀들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인도 내 프랑스에서 휴식하고 시선을 받으며 이 저녁 행복하게 집 밖으로 외출했다."(p.111) 이 이야기는 프랑스 식민지하의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쓰여졌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부조리, 허기, 기근이 있는 곳에 대해 쓰고 싶었을 뿐 이곳이 실제의 행정, 역사와는 다른, 작가 자신이 본 하나의 ‘소설적 지역’임을 분명히 한다.
최윤 번역가에 따르면 《부영사》에는 "상호 침투 불가능한 두 세계에 감히 침투와 소통을 이루고자 시도하는 또 다른 세계에 속한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도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과 거리두기를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그들의 관계가 지리적으로 반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유대인 수용소가 중심부에 있고 수용소장 부부의 집은 담장 너머 바깥에 있는 반면, 후자에서는 문둥병자와 걸인이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백인들의 관저 밖을 둘러싸고 있다. 최윤 번역가는 《부영사》 속 인물들을 "삶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그 고통이라는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라고도 비유 하는데, 이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영화를 보면 수용소에 새로 도입할 시설의 설계도를 두고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태우고, 불길이 지나간 자리를 냉각시키고, 또다시 태우는 과정이 더 빠르게 작동할 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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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 A24
관객은 영화 속에서 강제 수용된 포로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다. 그저 화단에 뿌려지는 재, 강가에서 떠내려오는 재,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재를 보게 될 뿐이다. 그것은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리 나와 다른 이들 사이에 선명하게 선을 긋고 절대로 접촉이 없을 것처럼 구획을 짓더라도, 결국 같은 공기를 마시는 우리는 모두 함께 재를 겪는다.
3.
실은 부영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건물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주어진 이름인 장-마르크 드 아슈이면서 동시에 부영사다. 부영사는 외교적으로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고 다음 부임지가 결정되기까지 임시적인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 자신이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저질렀는지 속 시원하게 밝히지 않아서 타인들로부터 평판이 깎여 나가고 있는 사람, 마침내 사랑을 맛보지만 동시에 "진행중인 삶 속의 죽음"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특히, 소설이 엔딩을 향해 갈수록 그는 상대가 원하는 한 마디의 대답도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 까다로운 이처럼 여겨진다. 질문이 던져지고 대답이 돌아오는 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 특성 중 극히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들었는데, 이 소설은 그 예외를 빗겨간다. 그는 수많은 물음표를 피해서 살아남는 자이고, 그런 점에서 거의 말이 없는 벽돌과 시멘트처럼 보인다.
그런 부영사가 소설 속에서 여러 번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가 있다. 이 곡은 어느 날 그의 내면에 있는 거실에서 시작되는 노래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는 닫혀 있다. 보면대 위의 악보 역시 닫혀 있다. 악보의 제목은 거의 읽을 수 없으나 「인디애나 송(Indiana’s Song)」이라고 적혀 있다. 철책의 자물쇠는 이중으로 채워져 있어 사람들이 정원에 스며들 수 없고, 다가가 악보의 제목을 읽을 수도 없다."(p.36)
「인디애나 송」의 곡조는 "고독하고 역겨운 행위에 대한 기억을 찢는 듯한 상처를 준다"고 되어 있는데, 휘파람을 무의식적으로 분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멜로디가 그의 평소 심리를 드러내는 것일 테다. 부영사의 '인디애나 송'이란 칠리 곤잘레스의 'Manifesto' 같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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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ifesto © Gentle Threat
현역 피아니스트 칠리 곤잘레스(Chilly Gonzales)가 마치 소설 속의 부영사처럼 그의 본명이 아닌 활동명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이 노래를 들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이 아닌 음악의 힘을 빌릴 때, 우리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호 제목은 MOT '재와 연기의 노래'를 오마주 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연내 국내 개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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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상실과 파괴, 외침과 눈물의 서사. 세 세계, 세 인물, 고통이라는 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3악장의 불협화음. 《부영사》의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아래 버튼을 통해 이벤트에 응모해주신 분들 중 구독자 총 10분께 도서를 증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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