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에 공개 된, 놓치면 안 될 케이팝 MV 5편
케이팝이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이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쓰여서 이미 닳아버린 수식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4월 말에 공개된 뉴진스의 ‘Bubble Gum’ MV를 기점으로, 이게 무슨 작당모의인가 싶을 정도로 '퀄' 좋은 MV들이 앞다투어 나오고 있는 중이다. 5월 6일부터 5월 15일 사이에 공개된 MV들 중에서, 눈에 담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던 다섯 편을 소개한다. 다음 다섯 편은 마음을 다해 추천한다. (한 번 씩만 꼬옥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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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브 'Accendio'ㅣ2024.05.15
정확히 공개된지 24시간 된 MV다. 아이브 EP [IVE SWITCH]의 더블 타이틀곡 '아센디오(Accendio)'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익숙하게 받아들일 주문이다. '불의 잔' 에피소드에서 해리는 물 속에서 이 주문을 써서 공중으로 튀어 올라 생존한다. MV가 시작되면 멤버들이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가을이 없어진다. 가을을 걱정하는 리즈가 집념의 부재중 전화를 열네 번이나 해도 받지 않더니, 그는 어디선가 요술봉을 들고 나타난다. 그 때부터 이들은 힘을 합해 12시가 될 때까지 요술봉을 안전히 지켜야 한다는 미션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위급한 순간에 아이브 멤버들은 마법 소녀의 장신구와 스타일링을 갖추어 변신한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 <웨딩 피치>, <천사소녀 네티>, <카드캡터 체리> 등의 90년대 마법소녀물을 보고 자란 어른이라면 이 MV를 보는 내내 마음이 동하는 걸 멈출 수 없다. 문제의 요술봉은 신성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중인 흑화된 아이브에게서 가을이 몰래 훔쳐낸 것이다. 그 씬은 약간 허술해서 웃음이 나오지만, 쉽게 빼앗긴만큼 흑화된 아이브는 마법 소녀 아이브와 꽤나 본격적인 결투를 벌인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안전하게 냉장고에 보관되기에 이른다.
같은 얼굴을 한 선과 악, 진짜와 가짜가 대립하는 구도 때문인지 나는 EXO와 X-EXO가 교차하던 EXO 'Obsession'이 떠올랐는데, 더 오랜 레퍼런스인 소녀시대 'Oh' MV의 쿠키영상이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걸 보았다. (이 MV에서는 치어리더 룩을 입은 'Oh'의 소녀들과 'Run Devil Run'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블랙 소녀들이 마주 보며 끝난다.) MV가 끝나면, 'Written and Directed by. 유광굉'이라는 크레딧이 뜨는데 기억해두면 좋을 이름이다. 유광굉 감독은 낙원상가의 팬츠리스룩으로 뚜벅뚜벅 활보한 허윤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르세라핌 [EASY] 트레일러 비디오, 그리고 엔하이픈 [DARK BLOOD] 컨셉 트레일러 비디오와 [ORANGE BLOOD] 컨셉 트레일러 비디오 등을 연달아 작업했다. "손 끝으로 아센디오"라는 직관적인 킬링 포인트 안무를 포함한 안무 작업에는 케라라케 라치카, 그리고 바다 리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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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파 'Supernova'ㅣ2024.05.13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는 이 MV를 보느라고 사실상 잠을 설쳤다. 11초에서 14초 사이에 1초 단위로 전환되는 에스파 멤버들의 면면은 이제부터 뭔가 대단한 게 펼쳐질 것을 예고한다. 2분 4초의 "수수수 수퍼노바"부터 이어지는 브릿지 파트는 수십 번을 돌려봐도 한결같이 울렁거리는 심상을 전해준다. 누군가는 바로 이런 상태를 '쇠파민(쇠맛+도파민)'이 터지고 있는 중이라고 부르는 듯 하다. 윈터는 하늘 위를 빛의 속도로 날아 다니고, 카리나가 날려버린 손가락은 그대로 지젤의 핸드폰 액정에 꽂혀 사정없이 스크린을 깨뜨린다. MV 속 멤버들이 각각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따른다. 초능력이라니, 2024년에 그런 건 지겹지 않은가 싶다가도 이 MV의 때깔(이 말의 대체어를 찾지 못하겠습니다)을 보면 굴복하게 된다. "남들 Y2K 이야기하면서 2000년대로 회귀할때 혼자 3000년대로 가버림. 유니크라는 말 위에 에스파가 있다."는 댓글이 좋아요를 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에스파의 첫 번째 정규 앨범 [Armageddon]에 대한 기대감이 커져간다.
생일을 빨리 맞이하고 싶어서 시계를 빨리 돌려버리는 시간의 통제자 지젤, 마음에 안드는 걸 손가락으로 불태워버리는 불의 통제자 닝닝, 힘이 아주 세고 자신의 얼굴에 취해있는 나르시시스트 카리나, 공기를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채로 상공을 활보하는 윈터까지. 그들의 능력 발휘는 마법 소녀가 된 아이브와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NCT DREAM 'POISON(모래성)' 트랙 비디오를 연출한 하정훈 감독이 'Supernova' MV 디렉팅을 맡았다. 메인 안무가 및 디렉터로는 여진이, 공동 안무가로는 라치카, 바다 리가 참여했다. 다들 에스파의 안무에 참여해 본 화려한 전적이 있는데, 특히 바다는 <넥스트 레벨>의 시그니처인 디귿 안무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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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 'Come back to me'ㅣ2024.05.10
군복무중인 RM이 두 번째 솔로앨범 [Right Place, Wrong Person] 발매를 앞두고 선공개곡 'Come back to me' MV를 공개했다. 시끌벅적한 파티 현장에서 옆 사람이 권하는 담배를 거절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후로 무언가 괴리를 느끼는 표정으로, 부적절한 기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움직임으로 이동에 이동을 거듭한다. MV 공개 전 티저 포토에서 깨알같은 참여진 크레딧이 공개 됐는데, 그 중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건 이 MV의 주연으로 분할 김남준(RM의 본명), 그리고 <파친코>의 김민하였다. 그 외에도 비주얼과 오디오로 각각의 크레딧을 살뜰히 뜯어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곡은 오혁이 작곡과 편곡을, 선셋 롤러코스터의 궈궈가 기타와 베이스 세션을, 그 외 바밍타이거의 산얀과 싱어송라이터 정크야드가 참여한 결과물이다. 바톤을 이어 받아 MV의 연출과 극본 작업으로는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이, 프로덕션 디자이너로는 <헤어질 결심>, <아가씨>, <마스크걸>, <작은 아씨들> 등의 류성희 미술 감독이 참여했고(아이를 돌보는 부부 뒤로 보이는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산얀은 MV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도 이름을 더했다.
슈퍼스타 RM과 인간 김남준을 적당히 한 덩어리로 뭉쳐서 굴리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는, 이미 그의 첫 번째 솔로 앨범 [Indigo]부터 풍겨져왔다. 그 앨범의 1번 트랙 'Yun'에는 故 윤형근 화백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현대미술 애호가이자 음악이 아닌 분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신의 작업에 녹여내는 RM의 이번 MV는, 온전히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설렁설렁 분위기에 취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감상을 남긴다. MV 연출이 처음이라는 이성진 감독 또한,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문'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문에 달린 세 가지 빛 또한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말씀하고 싶다. 다만 빛의 색감은 <성난 사람들>의 최종회에 사용한 색채들이다”라는 힌트 정도가 남았다. 내가 단정하게 정리된 해석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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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ㅣ2024.05.08
트리플에스의 완전체 컴백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해 사기가 꺾였다. 나는 케이팝을 도대체 언제까지 공부 해야 하는가? (300년째 공부 중인 기분이다.) 트리플에스는 모드하우스 소속의 24인조 걸그룹으로, 현재로서는 케이팝 걸그룹 중 최다 멤버 수를 자랑한다. (멤버 수가 웬만한 스타트업 3군데의 직원 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 이번 곡의 MV를 보기 전에 나는 음악을 먼저 들었는데, 총 24인의 멤버들 중에서 개인 파트가 1초대로 주어진 멤버가 9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질색팔색했다. (제일 긴 개인 파트를 맡은 멤버는 약 16초간 노래를 부른다.) 도대체 이 팀은 뭘 하고 싶은 걸까? 의구심은 'Girls Never Die' MV를 보고나서 깔끔하게 걷혔다. 제목처럼 MV에는 여럿 Girls들이 나온다. 가출을 한 것 같은 소녀, 게임에 중독된 소녀, 욕조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소녀, 그러다가 물에 잠겨버리는 소녀, 차가 다가와도 도로에서 몸을 피하지 않는 소녀. 그러니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중 일부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한 소녀다. ‘Girls Never Die’에는 현재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고 있는데, MV를 본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혼란스럽거나 버티기 힘들었던 한 시절을(대부분은 MV 속 주인공들처럼 10대의 시간을) 돌이켜 보고 있다. "그래 모두의 학창시절이 디토는 아니잖아 다시해보자", "정말 땅에 쳐박히는듯이 괴롭고 몸부림치다가도 그래도 다시해보자 하고 버텼으니 지금 이 노래를 듣는거고... 끝까지 가볼래 포기는 안 할래 난" 좋아요를 많이 받은 댓글들이다. 트리플에스라는 팀을 만든 정병기 디렉터는 “그냥 나는 세상에 없는 존재였고 비참하기만 했다. 지금 스무살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라며 이 곡을 소개했다.
디렉터의 블로그와 사람들이 단 댓글 두 세개를 읽고나서 MV를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갑자기 나는 현재의 내 나이를 잊고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들 중 한 명을 구하러? 아니다. 그저 속이 새까매진 그들의 곁에서 3분동안 얼쩡거리는 또래 친구가 되어 보는 것이다. 두 소녀 서연(S1)과 지연(S24)은 검은 날개를 달고 옥상에서 추락하지만, 제목처럼 그들은 죽지 않는다(Never Die). MV에서는 대신 검은 새들이 죽는데, 트리플에스 유닛이 2022년에 발표한 'Generation' MV에서도 2분 13초부터 춤을 추는 멤버들 뒤로 검은새가 보인다. 'Girls Never Die'에서는 24인의 멤버들이 같은 컬러의 의상을 입고 오와 열을 맞추어 각잡힌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들이 교차 된다. 퍼포먼스 디렉터 및 안무가로 최효제, 공동 안무가로 오상헌, 김지훈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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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븐틴 'MAESTRO'ㅣ2024.05.06
'음악의 신'에 이어 음악에 대한 음악을 또 만들다니 정말 세븐틴답다. 지난 9년간의 활동을 집대성한 베스트 앨범 [17 IS RIGHT HERE]의 타이틀곡 제목 자리에는 '마에스트로'가 놓였다. 지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곡은 티저 영상부터 화제를 모았는데, 이들이 'AI 시대의 음악과 창작자'에 대한 메시지를 은근히 암시하는 게 아니라 전면에 드러내놓을 것임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는 살 맛 나지 않을 디스토피아의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되는 MV에서 호시는 AI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고, 원우는 AI에게 통제당한 인간들과 1대 다수로 싸운다. (이 MV를 찍느라 가장 고생한 사람은 원우로 보인다. 액션스쿨도 두 번이나 갔다고 한다.) 우지는 옥상에서 피아노를, 디 에잇은 바이올린을 연주하지만 아무런 표정이 없다.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거다. 세븐틴 멤버들 주변에는 그들의 목소리와 퍼포먼스와 연주를 모방 하는 로봇과 로봇 개가 있고, 그들을 포섭해서 그들의 음악적 역량을 앗아가려고 하는 AI가 있다. 전반적으로, MV의 1절은 AI의 통제를 받는 세븐틴을, 2절은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하는) 진짜 세븐틴을 보여준다. 2분 20초부터 세븐틴으로부터 원경으로 멀어져가는 로봇 시점의 촬영은 어떻게 했나 싶었는데, 비하인드 영상을 보니 촬영 감독님이 와이어를 탔다고 한다. (보통 MV에서는 실연자인 멤버들이 와이어를 타기 마련이다.) MV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는 이효진이, 안무가로는 최영준, J-BAL, 바다 리, B.B Trippin이 참여했다.
세븐틴의 수많은 음악을 작업해 온 우지는 마에스트로에 대해 "기존의 세븐틴이 달려온 레거시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뭔가 새로운 시작 같으면서도 늘 성실했던 모양새가 그대로 있는 곡"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도 우리는 유튜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AI Cover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 어떤 뮤지션은 원곡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마어마한 연습량을 담보할 각오로 커버 무대를 준비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술의 도움으로 내가 원하는 곡과 원하는 목소리를 조합한 결과물을 찾아낼 수 있게 됐다. 나도 한동안 AI Cover 영상들을 찾아 들었는데 처음엔 기괴함을 느끼다가, 더이상 기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거기서 다시 한 번 기괴함을 맛보았다. 이 MV는 "Who is the real Maestro?" 라는 질문을 남기며 끝난다. 아이돌이 아닌 나. 그냥 음악을 들을 뿐인 나. 그런 나 또한 이 질문 앞에서는 작아진다. 나는 누군가를 통제 하고 싶은가, 아니면 통제 당하고 싶은가? 답은 오래 전부터 나와 있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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