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업계가 알아 본 '그림 기반 작업자' 4인
1번 트랙부터 10번 트랙까지 아티스트가 의도한 트랙 배치 순으로 듣는 대신 랜덤 재생으로 듣는 것. 이는, 음악을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 해 들을 수 있게 되면서 달라진 리스너의 모습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선후관계가 불분명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실물 앨범으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앨범을 사기는 한다. 그런데, 가끔은 그것들을 한 번도 재생하지 않은 채로 분리수거 한다.) 그리고 실물 앨범으로 음악을 듣는 일이 줄어들면서, 이 과정에서 앨범 커버를 들여다보거나 속지를 펼쳐 꼼꼼히 디자인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현저히 줄었다.
지난 해 매거진 <디자인>은 팬덤 데이터 관측 서비스 ‘케이팝 레이더’와 공동 기획하여, 디자인 관점에서 케이팝 산업을 들여다보는 ‘케이팝 디자인 아나토미’ 특별호(2023년 2월호)를 펴낸 바 있다. 신곡이 10초 밖에 공개 되지 않았을 때 팬들이 기다림을 달래는 방법 중 하나는 앨범 사양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인데, 이들은 흡족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의 인하우스 디자인팀에게는 찬사를 보내며, 그들이 협업하기를 선택한 외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및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각자의 분야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그림 기반 작업자'와 케이팝이 시너지를 일으킨 시도를 즐겨보는 편이다. 오늘은 케이팝 업계가 알아 본 네 명의 작업자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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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V 미니 5집 [Give Me That]ㅣ2024.06.03
illustrate by. 이소영 @soyoung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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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yV 'Give Me That' 앨범 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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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ayV 'Give Me That(Collection ver.)' 앨범 사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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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은 학부생 때 우연히 들은 식물 그림 수업에서 처음으로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해, “우리나라 정부 기관 중 식물세밀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지하여 세밀화 작업을 제도화하고, 세밀화를 수집해온 곳”인 국립수목원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식물세밀화가이자 원예학 연구가다. 식물에 대한 관찰과 기록을 모아 《식물 산책》(글항아리, 2018), 《식물의 책》(책읽는수요일, 2019), 《식물과 나》(글항아리, 2021)를 펴냈고, 최근에는 《식물에 관한 오해》(위즈덤하우스, 2024)를 출간했다.
"몇 년 전 극락조화의 꽃 그림을 전면에 보인 엑소의 앨범이 공개됐을 때, 팬들은 극락조화에 대한 정보를 찾느라 바빴다. 방탄소년단 뮤직비디오에 접목선인장이 나왔을 땐, 해외 최고의 케이팝 스타와 우리나라의 주요 화훼 수출품목의 조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최근 케이팝에 식물 등장 빈도수가 많아진 것 또한 우리나라에 식물 문화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케이팝을 만드는 디렉터와 디자이너, 뮤직비디오 미술감독 등 스태프에게 식물이란 존재가 깊이 각인된 덕분일 것이다."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케이팝과 식물' (서울신문, 2019.06.19)
몇 해 전 한 칼럼에서 엑소 정규 4집 [THE WAR](2017)과 방탄소년단 ‘LOVE YOURSELF 承 Her 'Serendipity'’(2017) 컴백 트레일러 영상을 예시로 들면서, 이소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음악계로부터 협업 제안을 받아왔다는 기색을 비춘 적이 있다. 그리고, 모든 저서에 SM(식물)이 들어간 창작자 답게, 케이팝 씬과의 첫 협업은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 WayV(웨이션브이)가 되었다.
앨범 [Give Me That]의 Collection 버전 커버는 물론 가사지에도 이소영이 그린 세밀한 곤충 일러스트가 있다. “도감의 형식, 과학 일러스트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 생물학 일러스트를 기록하는 과정과 동일하게 표본과 같은 형태의 목업을 제작해주셔서, 그것을 보고 그림 그릴 수 있었습니다”는 제작기를 보니 더욱 실물로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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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릿 미니 1집 [SUPER REAL ME]ㅣ2024.03.25
illustrate by. 이해선 @ehae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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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일릿 'SUPER REAL ME' 앨범 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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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은 독립출판, 앨범 아트워크, 기업과의 협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희미함 속에서 온전해지는 그림을 그린다”고 스스로를 소개 하다가, 언젠가부터 희미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작업물에 반영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눈이 나빠졌으면 하는 상상을 했어요. 그래서인지 안경이 없으면 안 되는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그러면 무서운 것을 전부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모든 게 또렷한 세상에서 겁이 많던 저는 그림 안에서만큼은 온전해지고 싶었답니다. ‘희미한 그림 속에선 모든 게 나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렇게 중심이 서던 시기에 이젠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독립 출판을 시작하고, 자연스레 페어에도 참가하고, 서점에 입고도 하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희미하고 흐릿했던 것들이 뚜렷해질 때'(<비애티튜드>)
이해선과 음악 씬의 첫 협업은 <쇼 미 더 머니> 7번째 시즌 출연진인 래퍼 오르내림(OLNL)의 ‘왜’(2021), ‘밝은 우산’(2021)의 앨범 커버 작업이다. 이어, 올해는 아일릿 데뷔 앨범 [SUPER REAL ME]의 피지컬 앨범 아트워크를 작업 했는데, 앨범 곳곳에 높은음자리표, 리본, 발자국 같은 디테일 요소들이 그의 바람처럼 희미한 듯 희미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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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스 미니 1집 [Sparkling Blue]ㅣ2024.01.22
illustrate by. 천계영 @KyeYoungC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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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투어스 'Sparkling Blue(위버스 ver.)' 앨범 커버 & 포토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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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영은 제 2회 윙크 신인만화 공모전에서 단편 만화 <탤런트>로 대상을 수상하며 1996년에 데뷔한 한국의 대표 만화가다. 첫 데뷔 장편 만화인 <언플러그드 보이>와 이후 <오디션>으로 저의 학창시절을 김수용 만화가의 <힙합> 시리즈와 함께 고이 물들였으며… 이후 <DVD>, <하이힐을 신은 소녀>, <예쁜 남자>, <드레스 코드>, <좋아하면 울리는> 등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특히, <좋아하면 울리는>은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드라마(김소현, 정가람, 송강 주연, 2019)로 제작 됐고, 웨이브는 좋아하는 사람이 반경 10m 내로 접근하면 알람이 울리는 앱이라는 만화 속 설정을 활용한 연예 예능 프로그램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2022)으로 변주를 주었다.
"레트로한 밴드 사운드의 얼터너티브 팝 장르인 'unplugged boy'는 TWS의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곡이다. 리듬감 있는 드럼과 베이스 연주와 함께하는 따뜻한 톤의 기타 리프와 신스, 그리고 '너와 함께라면 unplugged mode조차도 즐겁다'는 TWS의 감성적이면서도 경쾌한 에너지를 더했다." - 투어스 [Sparkling Blue] 곡 소개
그러다,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 ‘투어스’의 데뷔 앨범 2번 트랙 곡 제목이 ‘unplugged boy’인 것부터 이미 향수를 자극 했는데, 정말로 원작자인 천계영 만화가와 협업한 위버스 버전 앨범이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플러그드 보이>의 주인공 강현겸과 채지율 캐릭터 일러스트가 원화로 제공되어 앨범 커버 디자인에 배치 되었다. 풍선껌을 불며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나타나는, “난 슬플 땐 힙합을 춰”라는 명대사의 주인공인 강현겸.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는 청량을 메인 콘셉트로 한 신인 보이그룹을 선보이며, 이 앨범 디자인에서 “강현겸처럼 순수하고, 무해하며, 솔직발랄한 감성을 담고 싶었다”는 의도를 전했다. 투어스 [Sparkling Blue] 협업 소식 덕분에, 천계영 작가가 25년 전에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참여했던 H.O.T. ‘우리들의 맹세’(1998) MV 또한 케이팝 1세대 팬덤의 기억 저 끝에서 발굴 되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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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리패키지 ['the ReVe Festival' Finale]ㅣ2019.12.23
illustrate by. 권서영 @tototata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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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레드벨벳 ''the ReVe Festival' Finale' 앨범 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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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Our Beloved Boa' 앨범 커버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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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영은 몽환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세계를 구현하며 출판 업계와 음악 업계를 넘나들며 꾸준히 작업물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독자들에게 눈에 익은 표지를 다수 작업 했다. 장류진 《달까지 가자》(창비, 2021),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특별판(민음사, 2020)과 《목소리를 드릴게요》(아작, 2020), 조예은 《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버전(안전가옥, 2020), 범유진 《선샤인의 완벽한 죽음》(안전가옥, 2020),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아작, 2020),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아작, 2020) 등등 주로 국내 여성 저자들의 단행본 표지를 작업해온 것이 특징적이다. (그런데 2020년에 무슨 일이……? 다시 보니 권서영 작가님이 2020년에 정말 열일 하신 것 같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10대부터 줄곧 케이팝 등 대중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콘셉트와 음악적인 면에서 가장 좋아한 그룹은 f(x)”임을 공언한 적이 있다. 레드벨벳 '환생'(2017) MV 일러스트 작업을 했던 그는 2년 후인 2019년, ['The ReVe Festival' Finale] 커버 아트워크에도 참여했다. 이 앨범은 레드벨벳이 ‘축제’ 테마를 공유하면서 선보인 [The ReVe Festival] 3부작의 마지막 앨범이자, 이전 두 앨범에 새로운 수록곡을 더한 리패키지 앨범이다. (3부작 각각의 타이틀곡은 ‘짐살라빔’, ‘음파음파', ‘Psycho’ 순이다.)
['The ReVe Festival' Finale] 앨범 커버는 개별적으로는 장난감 집에 들어가 있는 소녀의 발, 무지개가 흘러나오는 분수, 줄지어 걸어가는 고양이, 인형, 로봇, 그리고 저 뒤로 음산해보이는 숲까지 뜯어볼수록 디테일이 흥미있게 다가오는 아트워크다. 앞의 두 커버는 권서영의 작업물이 아니지만, 3부작 아트워크를 나란히 놓고 보는 재미도 있다. 이듬해, 권서영은 보아의 데뷔 20주년을 기념하여 후배 아티스트들이 보아의 대표곡을 커버하는 음원 프로젝트 시리즈 ‘Our Beloved BoA’의 커버 앨범을 모두 도맡아 작업하며 멋진 연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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