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ㅇ 서문에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작가들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쓰고 흩어진 독자들은 연결되어 있는 마음으로 외롭지 않은 독서를 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잡지가 독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으려는 것만큼이나, 작가들이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집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독자가 동력이 되어주는 일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럼, 이렇게 작가들이 많은 세상에서 한 호의 주인공이 되는 작가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시나요?
김다희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해주거나 시선을 환기시켜주는 작품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선정하는데요. 그게 꼭 해당 작가가 다루는 작품 속 시대적 배경이 현대여야 하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정세랑 작가님이나 김초엽 작가님 같은 경우에도 미래를 배경으로 SF를 쓰시잖아요. 그런데 그 작품들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감각과 시선은 현 시대의 문제와 많이 닿아 있으니까요. 잡지의 주인공이 될 작가를 선정할 때에는, 그런 부분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요.
그리고 [글리프]의 맨 마지막 파트가 아카이빙 연표인데요. 작가가 등단한 이후, 혹은 등단 전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의 모든 활동을 최대한 이 아카이빙 연표 속에 담아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다루어보고 싶은 신인 작가님들도 많지만, 그런 경우에는 작품이 조금 더 쌓일 때까지 기다려보게 되기도 해요.
ㅎㅇ 맞아요. 그 아카이빙 연표가 각 호의 후반부에 있는데요. 진짜 어마어마하잖아요.
김다희 그 파트를 작업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정유정 작가님이었어요. 각 작가님들마다 아카이빙 연표의 볼륨이 다른데, 정유정 작가님은 거의 본문 반 연표 반이었어요. 아무래도 지금까지 저희가 다룬 작가님들 중 가장 집필 활동 기간이 긴 편이시기도 했고, 워낙 다작을 하는 분이니까요. 한국 문학 작가 한 사람에 집중해서 이런 식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연표로 풀어낸 자료가 별로 없어서 시작 했어요. 그런데 저희가 노력했음에도 빠져 있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최대한 채워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ㅎㅇ 다작하고 꾸준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의 활동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정리 하려면, 그 전제는 [글리프]를 만드는 에디터들이 그 작가의 작품을 다 읽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내가 어떤 작가에 관심이 생겨도 대표작이라 불리는 것들을 먼저 읽기 마련인데요. 바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요. 그런데도 이렇게 한 작가가 쓴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전작을 읽는 경험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지 궁금해요.
김다희 많이 알려진 유명한 대표작만 읽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는 디테일, 이를테면 작가님이 뭔가 한 켠에 가지고 있는 고민 같은 걸 발견해내는 기쁨이 큰 것 같아요. 구병모 작가님도 많은 분들이 《위저드 베이커리》(2022 개정판, 창비)의 작가로 아실텐데요. 그 작품만 읽은 분이라면 '판타지스러운 청소년 소설을 쓰는 분인가?' 하는 편견을 가질 수 있는데, 다른 작품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어떤 작가에게 자주 따라붙는 수식어나 워딩, 그런 걸 의심하게 되는 기쁨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저희가 지금 최은영 작가님 편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데, 최은영 작가님을 향해 가장 자주 수식되는 표현이 착하고, 무해하다는 거예요.* '근데 이게 맞나? 좀 더 복합적인 특징이 있는데?' 라는 생각을 최은영 작가님의 작품을 몰아서 읽는동안 하게 된 거죠. 그렇게 독서를 좀 더 주체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거 같아요. 아이돌 음반에서도 타이틀곡보다 수록곡이 더 좋다고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내 취향을 저격하는 수록곡이요. 문학도 마찬가지예요. 전작 읽기를 하면, 나를 저격하는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죠.
* 팟캐스트 녹음일 기준으로는 출간 준비중이었던 [글리프] 7호, 최은영 편은 2023년 5월에 출간 되었다.
ㅎㅇ 방금 예시로 들어주신 게 너무 이해가 잘 되는데요. 실제로 수록곡 중에 명곡이 진짜 많아요. 아이돌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줘야 하는 타이틀곡의 콘셉트는 어쨌든 선택과 집중에 의한 것이지만, 사실 그게 그 팀의 전부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요. 전작 읽기는 마치 덕후가 아이돌의 자컨이나 데모 음원을 찾아서 보는 것, 그런 활동과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김다희 [글리프]가 ‘덕질'이라는 키워드를 쓰는 이유예요. 작가의 대표작에서 느껴지는 어떤 아우라가 있죠. '어떻게 이렇게 쓰셨지?' 싶은 것들이요. 하지만, 그 작가의 데뷔작부터 읽어보면 좋고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쓰던 스타일이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변화 과정도 보이거든요. 아이돌을 덕질하면 데뷔부터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죠.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님들도 20대 때 쓰던 작품에서 읽히는 고민이 있고, 30-40대로 넘어오면서 변화한 고민과 문체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색다른 경험을 하실 수 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님이 있으면 전작을 쭉 파보시는 것, 정말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