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ㅇ 첫 번째 수록작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이하 「알렉산더」)는 신생아를 돌보는 미주 부부가 왜 그런 얼굴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는 무척 잘생긴 AI 육아도우미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도움을 받는 일주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얼마 읽지 않아서 17쪽에서 "좆같은"이라는 단어를 마주쳐서 세어 봤거든요. '이 페이지에 "좆같은"이 몇 번 나오는 거지?'(웃음) 그 형용사가 총 7번이 나오더라고요. 워킹맘인 미주가 가지고 있는 분노와 한을 볼 수 있는 지점이었는데요. 그의 입장에서는 출산과 육아를 해나가기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힘들게 느껴지는 거죠. 과연, 미주가 최후의 책임을 돌리고 싶었던 가장 좆같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이경 지금 우리나라가 인구 소멸 국가 1위가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하는데, 한국 사회 시스템이 어떤 좆같은 것의 집성체죠. 저는 사실 이 욕설이 비유가 아니라 문맥적으로도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가부장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시스템에서는 여성이 임신하는 순간부터는 주로 엄마가 모든 결과를 떠안도록 강제 하거나 암묵적으로 몰아가고, 고생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잖아요. 시스템으로나, 분위기로나 모두요.
저한테 피부로 와닿았던 건, 임신해서 병원에 갔을 때였어요. 제가 뭘 먹었는지, 어떤 운동을 했는지 모든 게 의사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지더라고요. 제가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는 걸, 재생산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됐어요.
ㅎㅇ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신생아용 젖병 소독기의 브랜드명은 '보틀스'인데요. 정말 산뜻하더라고요. 이름만 보면 약간 프랜차이즈 디저트 가게 같기도 하고요.
이경 '보틀스'라는 이름은 이번에 책으로 엮으면서 바꾼 이름인데 산뜻하게 느껴지신다니 굉장히 기쁘네요.
ㅎㅇ 저는 다섯 장 가까이 펼쳐지는 보틀스 CEO의 인터뷰 파트를 꽤 인상적으로 보았어요. 왜 그들이 젖병 소독기에 인공 AI를 탑재하게 됐는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는 젖병 소독기가 완벽하게 살균을 해낸다는 건 그다지 시장에서 차별점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사용자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대화형 AI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죠. 이 CEO 인터뷰 파트를 쓰시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이경 제발 이런 CEO가 세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게 됐는데요. 젖병 소독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돌봄 노동은 어차피 노동이라서, 어느 정도의 완성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거든요. 필요한 기준을 만족하면 거기서 끝나는데, 우리는 사람이니까 늘 그 이상의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되죠.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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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젖병 소독의 천사, 보틀스의 엔젤이야. 잘 부탁해, 미주."
(...) 온화한 어저로 해야 할 말을 마친 남자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미주가 '스웨덴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이케아와 함께 스웨덴의 최대 수출품'이라 불리는 배우의 이름을 기억해낸 것은 그때였다."
-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 p.13-14
ㅎㅇ 대화형 비주얼라이즈드 AI인 알렉산더를 "젖병 소독기의 천사"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보통 천사는 갓 태어난 아이를 수식하는 표현이잖아요. 천사 같은 내 아이. 모성애를 자극하거나 주입하는 표현이기도 하죠. 성인의 비주얼을 가진데다가 미주의 협업 상대이기도 한 알렉산더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경 항상 옆에 붙어서 주인공을 지켜준다는 의미의 수호천사를 떠올렸고요. 또 하나는,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있는 시기에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일 자체가 기적적인 경험으로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기적을 일으키는 건 역시 천사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이왕이면 팬심을 가진 사람의 얼굴이면 좋을 것 같았어요.
ㅎㅇ 그것은 작가님 개인의 호감이나 팬심이 담긴 선택일까요?
이경 그렇죠. 개인적인 팬심이 있어요. 데뷔작 「알렉산더」는 누구한테도 읽힌다는 보장이 없는, 저를 위한 이야기에 가까웠거든요. 쓰기의 출발이 그랬기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구마구 등장시켜서 어느정도 사심을 채웠던 것도 있어요. 가능하다면 이 기회에 이 배우분* 을 다른 사람들이 좀 찾아봤으면 좋겠다는 영업의 마음이랄까요? 그런 것도 조금 있었고요.
* 스웨덴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카드(Alexander Skarsgard).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2016)에서 타잔/존 클레이튼 역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