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님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미디어창비, 2023)
ㅎㅇ : 바빠서일 수도 있고, 어떤 이유로든 계절의 변화에 무감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사계절의 변화를 캐치하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뭐가 좋을까요?
달님 : '이맘 때'가 많이 생기는 게 좋아요. 농사를 짓는 분들은 계절을 좀 더 촘촘하게 읽는다고들 하잖아요. 예를 들면 겨울이 지나고 땅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때, 농작물을 심기 좋은 때, 과일이 잘 익어가는 때, 수확하기 좋은 때에 맞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요. 우리도 다르지 않아요. 봄볕을 뒤집어쓴 것처럼 버드나무잎이 돋아나는 때, 자주 가는 책방에 비파나무 열매가 열리는 때, 친구가 사는 동네에 무화과나무가 열리는 때, 우리집 앞에 계수나무잎이 떨어지는 때, 이런 식으로 이맘 때들을 기억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풍경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금목서 향이 나는 때죠!
ㅎㅇ : 요즘 SNS에서는 '금목서 향 맡을 일이 없는 서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더라고요. 같은 시기를 살고 있더라도 이곳에는 없지만 그곳에만 있는 것들이 있죠.
달님 : 오늘 걷다 보니 서울의 가로수는 플라타너스가 진짜 많은 거예요. 엄청 큰 이파리가 거리에 많이 떨어져 있더라고요. 부러 몇 개를 밟아봤더니 기분이 좋았어요. 창원의 거리에는 메타세콰이어나 은행나무가 많거든요. 이렇게 또 '이맘 때 서울에는 플라타너스 잎이 많이 떨어지는구나' 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됐어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실감이 좋은 것 같아요. '플라타너스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데 내가 걷고 있다'라거나 '금목서 향이 많이 나는 동네에서 이동하는중이다'처럼요.
ㅎㅇ : 전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수오서재, 2022)를 보니, 글쓰기 수업에서 '지난 열흘 동안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던 장면 두 가지'를 과제로 내주신다고요. 이 질문에 대해 지금의 달님 님 버전으로는 어떤 답변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달님 :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이 결성한 밴드 '잔물결'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갔던 게 떠오르네요. 그동안 정식 발매 전의 데모곡을 반복해서 들었는데도 그날따라 유난히 노래가 좋은 거예요. 이 모든 걸 제 친구들이 다 만들어 냈다는 게 멋지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제가 이들의 시작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는데요. 쟤들은 자신들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없잖아요. 그걸 내가 바라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 기억해 줘야겠다, 라는 책임감도 생겼고요. 잔물결은 오는 11월, 데뷔앨범 [꿈은 없던 일]의 발매를 앞두고 있는데, 친구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걸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바랄 수 있어서 그게 참 행복하다고 느껴졌어요.
ㅎㅇ :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던 또 다른 장면은 무엇인가요?
달님 : 이번 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거의 매일같이 보는 동료 작가인 수미 언니가 저에게 인사를 해주었던 순간인데요.
ㅎㅇ : 아, 한동안 달님님한테 집밥을 해주셨다는 분이요!
달님 : 맞아요. 며칠 전에 심심해서 "수미 언니, 뭐 해?"라고 물었더니 집 앞 카페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대요. 책 두 권을 챙기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서 "언니한테 뛰어갈게"라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수미 언니네랑 저희 집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요. 당연하지만, 3분만 뛰고 나머지는 걸어갔어요.(웃음) 카페에 들어가기 직전에 언니가 혼자 작업하는 걸 차창 너머로 슬쩍 봤어요. 언니가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제가 바라보고 있던 혼자만의 작업시간이 굉장히 소중할 것이거든요. 근데 카페에 들어서니 언니가 엄청 반갑게 인사를 해주는 거예요. '저렇게 인사 해주니까 내가 되게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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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씩 인정한다
다 친구들 이야기였다. 김달님이 친구들을 좋아한다는 건 전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부터 신작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에 걸쳐 꾸준히 발견되는 지점이다. 그는 "제가 친구들을 되게 많이 좋아한다는 걸 이번 인터뷰 준비하면서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김달님이라는 에세이스트를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 또한 그가 동료들과 함께 벌인 ‘어떤 요일’ 프로젝트였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여러 작가가 담당한 요일마다 주간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요일 작가의 글이 궁금해서 이 프로젝트를 구독했던 나는, 김달님의 ‘오늘도 못한 일'이라는 제목의 연재를 따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에는 당시의 연재 원고가 일부 들어있다.
ㅎㅇ : 바다 수영하기, 친구들보다 늦게 자기 등을 못하는 스스로를 자기 객관화 하는 장면들이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달님 : 저는 못 하는 게 많은 사람이에요. 그 못함을 최대한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고요. 하루는 친구 앞에서 음정이 제대로 안 맞는 노래를 부를 일이 있었는데 부르고 나니 되게 재미있는 거예요. 나도 웃고, 걔도 웃고. 같이 웃으니 좋았어요. 이런 게 못함의 유용함인가 싶었죠.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보다 무엇을 못하는지가 저 자신을 더 잘 설명해 준다고 느꼈어요. '그럼 내가 못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하게 된 거죠.
ㅎㅇ : 이렇게 '잘 못하는 일'에 대해 들여다보고 쓰는 경험은 어땠나요?
달님 : 약점은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지만 글로 써보니 계속 못 해도 괜찮다는 걸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무언가를 못 하는 나를 나부터 재미있게 바라보면 다 되는 거구나 싶었거든요. 그리고 '못하는 나' 역시 '나에게서 엄청 중요한 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ㅎㅇ : 잘 못 하는 일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신 건 아니었군요.
달님 : 맞아요. 계속 수영 못해도 된다. 물에 젖는 느낌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못 하는 걸 반대로 아주 잘하는 친구들이 있으니 걔네한테 의지해서 살면 되는 것 같아요. 또 제가 ‘길 찾기’도 잘 못하는데요. 친구들을 잘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ㅎㅇ : 안그래도 저희가 주고받은 메일에서 달님 님의 마지막 문장이 "잘 찾아가겠습니다"였는데, 오늘 인터뷰 장소까지 잘 찾아오셨네요!
달님 : 제가 있던 곳에서 지도 앱을 확인해 보니 쭉 직진이어서 다행히도 잘 왔죠…. (웃음)
책을 읽다가 가장 놀란 순간은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챕터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의 새벽 여섯 시부터 여섯 시 반까지 30분 동안 벌어진 대화를 다룬다. 새벽에 기차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올라탄 택시에서 기사님과 나눈 대화문이 길고 상세하게 복기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대화문을 쓰는 데 취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쓰기의 노하우를 청했다.
ㅎㅇ :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잘 기억하고, 그걸 지면에 왜곡 없이 옮겨 적는 방법이 있을까요?
달님 : 상대의 말을 기억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먼저 대화를 향한 집중력을 굉장히 높이려고 하고요. 가능하면 메모를 해두어요. 택시 기사님과 대화 할때도 중간중간 메모를 했어요. 그러고는 다음 행선지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을 더 긴 분량으로 기록해 두었어요.
ㅎㅇ : 대화와 기록 사이에 시차가 크지 않게끔 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달님 : 제 글에 다른 사람들이 들려준 말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 오래전에 들었던 말일 경우 제가 정확하게 재현해 내지 못한 말들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부분은 잊어버리기도 하고, 일부분 다르게 기억했을 수도 있고요. 그럴 때는 세부 사항이 조금 다르게 적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상대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을 때의 마음을 해치지 말자 라면서 주의하려는 편이에요. 가장 좋은 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확인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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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너무 좋아한다
사람 이야기를 잔뜩 하다가 우리는 갑자기 밴드 실리카겔 이야기를 했다. 나는 9월의 철원에서, 10월의 부산에서 실리카겔 무대를 보며 가을을 나는 중이었고, 11월에 열릴 실리카겔의 단독 콘서트를 티켓팅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인터뷰 직후 가까스로 취소표를 잡았다). “우리 콘서트 절대 없어 포도 / i do it i do it 넌 맛 없는 라따뚜이 / 혹 배가 아프다면 고소해” 슈가는 ‘MIC Drop’(2017)에서 이런 랩을 들려준 바 있는데, 이는 공연 예매 사이트(특히 인터파크)에서 예매 가능한 좌석이 보라색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것이 덕후의 눈에는 마치 포도송이에 달린 포도알처럼 보인다는 걸 인지한 결과 쓰여진 가사다. 김달님은 매일 할머니를 보러 요양병원으로 가는 생활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던 어느 날, 방콕에서 열리는 방탄소년단 콘서트에 다녀온 날에 대해서도 이번 책에서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