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페이지보이' 증정 이벤트가 있어요.
1.
"내 진짜 세계보다 더 진짜 같던 거짓 세계를 또 한 번 헤맬 기회가 생기다니."(《페이지보이》, p.74)
엘리엇 페이지는 《페이지보이》에서 드라마 <핏 포니>(1997)에 캐스팅되었을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초등학교 연극반에서 비둘기 또는 남자아이 역할을 맡았던 그가 처음으로 아역배우 오디션에 임했던 9살 때의 일이다. 엘리엇 페이지에게 있어 '진짜 세계'는 누군가 그에게 드러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반면에, '더 진짜 같던 거짓 세계'는 배우로 살아가는 세상이자, 엘리엇 페이지가 자기 자신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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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태어나 여성 배우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애초부터 알았다"고 말한다. 여자가 아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를 치열하게 탐구했지만, 진짜 세계에서의 깨달음과 별개로 그는 헐리우드를 무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했다. <주노>(2007)에서 선보인 주연 '주노 맥거프' 역으로 2008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기 때문이다. 엘리엇 페이지는 영화 촬영 자체보다도 영화를 홍보하는 시기가 어려웠다는 의외의 고백을 한다. 그것은 "몸짓언어와 목소리를 바꾸고, 나를 위해 선택된 역할에 맞게 연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에서 열리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 시사회를 위해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자신을 보며 기뻐하던 얼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인터뷰를 위해, 화보 촬영을 위해, 레드카펫 위를 걷기 위해 "의상 피팅을 할 땐 내면이 갈기 갈기 찢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괴로움은 일시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배역을 연기하고 있을 때조차도 더는 여성스러운 옷을 입을 수가 없다"는 상태로 이어진다. 그냥 여성스러운 옷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가 원래부터 가슴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스포츠브라를 꼭 챙겨 입는다거나, 품이 넉넉한 상의 또는 트렁크 수영복을 좋아한 이유는 단지 선호하는 옷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다.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지만, 한 사람에게는 계속 이어질 삶의 한 변곡점에서 엘리엇 페이지는 성확정수술을 했고, 남성이 된다.* 그는 수술한 다음 해, 자신의 SNS에 (여성의 가슴이었던 것을 제거한) 흉터가 보이는 몸을 드러낸 사진을 올렸는데, 이 책은 혐오 세력이 댓글창에서 들끓을 수도 있었던 그 포스팅을 올렸던 날을 "이제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몸을 가지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이 된 순간이라 돌이켜본다.** 그는 그 후로도 주기적으로 남성호르몬의 일종인 테스토스테론을 몸에 주사하는 테스토스테론 요법을 실험 중이라고 한다. 그렇게 배우로서는 계속 연기 하지만, 삶에서 연기하기는 그만둔다.
* '성확정수술(Gender confirming surgery)'은 환자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성을 지정한다는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용어다. '성전환 수술(Sex change surgery 또는 Sex re-assignment surgery)'을 대체하는 말로 쓰인다.
** 그는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몸을 가지기 전에, 자신이 '트랜스'임을 공개 선언을 하면서 먼저 이름부터 개명했다. 그동안 여러 영화의 엔딩크레딧에서 보여졌던 '엘런 페이지(Ellen Page)'가 아닌 '엘리엇 페이지(Elliot Page)'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엘리엇 페이지는 대중에게 사소한 개인사까지도 노출되는 유명 스타이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늘 파파라치가 붙었다. 그래서 그동안 그와의 교제 상대 또는 파트너가 누구인지는 검색을 통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페이지보이》는 회고록이지만, 자기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 무엇보다 그를 거쳐간 거의 모든 사랑들을. 연애사 분량이 적지 않다는 소리다. 아예 시작하는 에피소드부터 첫눈에 반한 '폴라' 이야기를 하는데, 책 전반에 걸쳐 수준급 플러팅, 교제의 시작, 꼬박꼬박 다가오는 이별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엘리엇 페이지는 일을 일찍 시작했을 뿐 아직 30대 밖에 안 됐다. 이 회고록은 30대에 쓰였구나. 이는 '엘리엇 페이지가 회고록을 쓰기에 적합한 나이를 가진 사람인가?' 라는 의문으로 번질 수 있을 것 같다. 회고록을 쓰기에 그가 삶을 더 살아보는 쪽이 좋겠다는 섣부른 느낌이 고개를 든다. 솔직히 말해, 이점이 나에게는 엘리엇 페이지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마주한 가장 큰 장벽이었던 것 같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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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캐스트
그리고 여기, 회고록을 낸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나이 든 사람이 있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파비안느'는 극중 프랑스를 대표하는 중년 여성 배우로, 이 역할은 까뜨린느 드뇌브가 연기한다.* 캐릭터가 가진 커리어와 실제 배우가 가진 커리어가 거의 동일하게 포개진다. 까뜨린느 드뇌브가 1943년생이라는 점과 이 영화의 촬영 일정을 함께 고려해 보면, 까뜨린느 드뇌브가 연기하는 파비안느는 약 70대 후반 즈음 회고록을 발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파비안느의 회고록이 출간된 날부터 시작되는데, 그 책의 제목은 《진실(La vérité)》이다. 그가 배우 활동을 하는동안 어떤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혹은 자신을 거짓들로부터 지켜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발언권을 덜 가졌는지 전후 사정을 알 수는 없다.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는 회고록이 인쇄 되기 전에 원고를 보게 해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엄마에게 마구 화를 내는데, 그와중에 엄마는 이미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이 책의 초판을 10만 부나 찍었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뤼미르 입장에서는 어쩌면 10만 명이나 볼 수도 있는 엄마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모녀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게 두려울 수 있다. 혹은 엄마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신뢰하지 못하는지도. 뤼미르가 화난 이유는 후자다. 그날 밤, 뤼미르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진실》에 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가 된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어렸을 때 하교하는 자신을 엄마가 반갑게 맞이해 줬다고 책에 적혀 있는 건 사실관계에 어긋나지 않느냐며 엄마를 나무란다. 엄마는 나한테 그런 적 없었잖아요. 이 대화는 정말 웃기다.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진실은 전혀 재미없거든. 네 얘기가 적어서 이러니?”
“나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 이건 내 회고록이야. 선택권은 내게 있는 거잖니?”
-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한편, 이 책을 뤼미르만큼이나 성실하고 또 빠르게 읽는 사람이 또 있다. 파비안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했던 백발이 지긋한 비서 '뤼크'다. 최근 이효리는 유튜브 <요정재형>에서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나와 같이 20년을 늙었다”고 했다. 현재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과는 동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감각과 센스를 발전시키는 게 어렵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효리는 현재의 스태프들을 젊은이들로 바꿀 수 없다면서 그들을 향한 신뢰를 보낸다. 뤼크 또한 파비안느와 함께 나이 들고 오랜 시간을 쌓아온 아주 믿을만한 조력자다. 그런 그가 파비안느에게 갑자기 자신의 손주들을 돌보며 여생을 살고 싶다며 비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뤼미르가 진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회고록에 내 얘기는 한 줄도 없더라. 내 존재를 전부 부정당한 거나 다름없어."
이 영화는 회고록의 저자와 비교적 가까웠던 두 사람이 얼마나 그 책을 충실하게 읽으며 또한 의심하고 상심하길 반복하는 독자인지 보여준다. 자전적 이야기 쓰기는 그 단순한 제목처럼 '진실'해야 한다는 윤리적 문제를 동반하지만, 녹음되거나 촬영되지 않은 상태인 인간의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어서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파비안느의 말처럼 "선택권은 내게 있는 거잖니?"라고 말하는 이를 통해 피해자 됨을 재확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정말로 내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취를 쌓아가며 나이가 든 사람은 회고록을 쓸 자격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완벽하고 안전한 회고록의 저자는 아닐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 파비안느는 적절한 용서를 구해야 할 상대에게 자신이 미처 회고록에 담지 못한 내용을 2쇄에 반영하겠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아참, 파비안느는 거짓말을 했다. 그의 회고록 초판은 5만 부가 찍혔음이 곧 밝혀진다. 어쨌거나, 자신의 책이 5만 부는 거뜬히 팔릴 것이라는 대스타의 포부는 대단하다). 이것은, 파비안느가 회고록이라는 형태의 책을 내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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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silis Marmatakis
다시, 《페이지보이》로 돌아와서 이 책의 실물을 보았을 때 받은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영화 <더 랍스터>의 포스터를 바라보았을 때 받은 인상이 떠올랐다. 이 포스터는 미국의 한 영화매체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 포스터 20' 중 1위를 차지했다. "올해의 가장 난해하고, 복잡하게 상상되고, 설명할 수 없는 영화 중 하나를 가장 놀랍도록 단순화하는 기술은 천재적인 수준"이라는 포스터 평에 공감한다. 이 포스터를 작업한 디자이너 바실라스 마르마타키스는 "혼자 있는 느낌과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누군지 알 수 없지만, 포스터 덕분에 주인공에게 안겨 있는 미지의 존재를 상상해보게 된다. '안아줌'과 '안겨 있음'이라는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책은 주로 단행본에서 볼 수 있는 책날개보다 거대한 책날개가 배면(책등의 반대편)을 감싸고 있는 북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책날개에는 "눈을 감고 걸어나와(close your eyes and step through)"가 선명한 서체로 적혀 있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며 누군가를 연기하는 일을 그만두고 점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엘리엇 페이지의 이야기. 퀴어 여성이었고, 트랜스 남성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다른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데, 《페이지보이》의 책날개는 이 이야기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디자인이라는 형식이 메시지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가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회고록을 낸 엘리엇 페이지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과 혐오하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때에 이 책을 썼다. 아마 앞으로도 주변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우리는 모두 끝없이 배워 가는 존재들이고, 나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으니까."(p.385, 《페이지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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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 <인셉션> 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회고록.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용감하고 힘 있는 기록. 《페이지보이》의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아래 버튼을 통해 이벤트에 응모해주신 분들 중 구독자 총 10분께 도서를 증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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