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8일의 트랙인트로 © EDAM엔터테인먼트
팬송은 유료 팬클럽을 인증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독점적인 리워드 같은 것이 아니기에, 팬송의 청자는 팬덤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이 노래를 듣는 누구나 팬송의 서사에 자신을 몰입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영상통화 팬사인회와 버블이 케이팝 기초 문법이 된 시대에, 자기 생각을 24시간중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도구로 취사 선택하여 표현할 수 있음에도 '팬송'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 아이유의 선택이 폄하 당하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정확히는 '팬송'이 수많은 유행가 중에서도 '팬에 대한 사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고작 팬송'처럼 하찮은 취급을 당하는 걸 보는 게 놀랍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유가 '마음', '삐삐' 등의 팬송을 발표 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모든 논란은
누적 된 선택들의 결과인가?
결국, "Love wins"와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간의 상관관계를 아이유가 정말로 몰랐을까? 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나의 일상에 대입해보더라도 무지해서가 아니라 알고도 하는 선택이 누군가를 기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최신 밈을 섭렵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정확히는 자신을 향해 관심과 애정을 보내주는 팬들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 시대 정서와 감수성을 업데이트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최신 버전까지 업데이트 되었는지를 자기가 가진 음악이라는 무기로 드러내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티스트의 숙명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대체로 아이유는 '알고도 그랬나, 아니면 정말 몰랐나'라는 수많은 물음표의 중심에 서곤 했다. 이번에도 가수가 노래를 잘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레퍼런스 조사라는 의견들이 줄을 이었다. 기획 의도와 달리 곡해될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는 직업인들은 창작 과정과 별개로 부지런히 검색하고 공부한다. 미움 받을 용기를 넘어설 정도로 나의 이야기가 날조될 가능성까지 셈하면서 작업의 층위를 섬세하게 쌓아올리는 게 아이유에 대해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가지는 기대치다. 우리가 그 정도의 기대치를 가지는 건 온당해보인다.
가혹하지만, 아이유가 대중의 구설수에 오를만한 선택들을 누적해왔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인기의 지표이기도 했고, 활동을 끊지 않고 이어나가는 행보 자체로도 많은 함의를 지닐 수 밖에 없는 17년차 케이팝 여성 솔로 뮤지션으로서 현재의 그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5년 아이유는 미니 4집 [CHAT-SHIRE]의 수록곡 ‘Zeze’를 발표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앨범 발매 전후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학대로 인한 아픔을 지니고 있는 다섯살 아이 '제제'가 자신에게는 섹시하게 느껴진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노랫말과 앨범 쟈켓에서 성적 대상화 된 제제를 보며,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한국어판 출판사 동녘은 직접 아이유를 겨냥하며 유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아이유는 맞대응을 했고, 곧 창작물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는 출판사의 입장문과 함께 이 해프닝은 마무리 됐다. 2018년에는 아이유가 주연으로 출연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캐스팅과 로그라인이 공개 되면서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다. 중년 남자와 젊음과 가난을 동시에 가진 여성의 로맨스. 약자의 위치성을 가진, 그토록 구시대적인(것 처럼 보이는) 이지안 역을 향한 아이유의 선택은 드라마 방영 전부터 시끄러운 여론으로 이어졌다. 2021년, 아이유의 미니 5집 [LILAC] 수록곡 'coin'에는 "저리 가서 놀아줘 / it’s no kids zone"이라는 가사가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장면을, 하필 혐오의 말인 '노키즈존'에 비유한 것이다. 노키즈존에 관한 논쟁 자체는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애초에 없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인데, 그는 이 말을 너무나도 쉽게 다시 수면 위에 올렸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가 지금까지 내려 온 선택들과 "Love wins" 건을 하나로 묶어서 '역시 아이유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논란 하나하나에 악플을 달거나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더라도 결국 가십거리를 중심으로 한 사람을 해석하려드는 나쁜 방식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그가 나만큼이나 복합적인 인간일 수는 없다는, 한없이 단순할 존재일 뿐이라는 섣부른 선언이다. 아이유는 그의 팬들이, 그리고 팬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험들을 하며, 어떤 욕구를 가지고, 어떤 한계를 느끼며 살아가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걸까.
지난 날 몇 번의 의아함이 있었음에도, 아이유가 내린 어떤 선택들은 나를 감화시켰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2017 MMA '이름에게' 무대인데, 여기서 아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러닝타임의 절반을 코러스 전문 가수, 버스킹 가수 등으로 살고 있는 무명 가수들과 일반인 약 60여명이 자기 이름을 직접 소개하고, 이 곡을 합창 씬을 연출하는 데에 썼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꿈꾸지만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자기만의 무대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의 라이브를 들은 후에 현장에서 아이유는 마치 답가처럼 자신의 노랫말을 부른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니 이름을 알아”
이 무대로부터 3년이 지난 후 JTBC는 경연 프로그램 <싱어게인>을 론칭 했는데, 이는 음원을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음원 성적이 좋지 못했거나,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잊혀진 무명 가수들에게 한 번 더 노래할 기회를 주고 그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는 콘셉트를 가졌다. 아이유가 같은 취지의 일을 몇 해 전에 먼저 했던 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무대가 당연하지 않다는 걸 그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각한 결과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유는 영화 <브로커> 관련 한 인터뷰에서 미혼모인 '소영' 역을 연기하면서 자신이 미혼모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그는 한국미혼모가족협회에 자신과 팬덤의 이름을 합친 기부자명 '아이유애나'로 3년간 기부를 해오고 있다. 이 기부금은 미혼모 가족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쓰였다고 한다. ('아이유애나'는 한부모가정, 소외아동, 독거노인 관련 재단에도 꾸준히 기부를 해왔는데, 그는 다른 것들과 달리 특히 미혼모를 위한 기부 의도를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노래를 들어보기 전에
입장을 정해야 한다면
그러니까, 나는 남들의 기준에는 부족할지언정 17년차 뮤지션이 '좋은 직업인'이 될 수 있는 방식을 그동안 충분히 훈련했으리라는 작은 신뢰가 있다. 그것이 내가 그동안 가사를 직접 쓰는 싱어송라이터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유로부터 나온 것들(앨범 뿐 아니라, 무대 연출, 기부처 정하기를 포함한 것들)을 좋아했던 이유다. 나는 이러한 일들을 볼 때 아이유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의 쓰임과 파장을 알고 있다고, 세상과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고, 적어도 그정도로 나이브하지는 않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가 "Love wins"를 공개하기 직전에 이 용어에 대한 레퍼런스 조사를 마쳤고 그게 어떤 뜻인지 잘 알고도 쓰기로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그렇게까지 멍청할리가 없다(고 믿고 싶다.)
어떤 말이 가진 본연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미진하게 그 말을 사용한 (것 처럼 보이는) 그를 탓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Love wins'라는 제목의 아이유 신곡이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일상적으로 스트리밍 될 수 없는 종류의 음악일지, 노래를 들어보기도 전에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왜일지, 들어보고 또 헤아려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까. 똑같은 걸 보고도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는 순간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니까. 아마도 아이유를 향해 실망을 표하는 쪽은 반복된 역사를 겪은 이들일 것이다. 투쟁을 통해 수호한 언어가 지워지고 의미가 희석되면서 결국 자신의 존재까지 사라지는 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유를 향해 쏟아지는 말들에서 요점은 적고 트집 잡기와 출처 모를 분노가 더 많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멍청하고 나이브한) 널 일깨워주고 싶다”인가? 아니면 “우리는 (사랑이 이긴다는 구호를 평생 외쳐야 할) 누구누구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