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플랜 75' 예매권 이벤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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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보험료와 실비 보험료를 꼬박꼬박 납부하고, 종종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조회해본다.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죽음은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생의 마지막이 산뜻함과는 대척점에 놓일 확률이 높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그 사실은 나를 크게 두렵게 만들지 않는다. 30대 중반인 내가 늘어놓고 있는 이 말들은 진실일까?
영화 <플랜 75>는 7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설정의 근미래 일본이다. 거동에 크게 불편함 없이 호텔로 출퇴근하며 룸메이드 일을 하고, 직장 동료들과 가라오케에 놀러 다닐 정도로 그럭저럭 교우관계도 좋은 78세 주인공 ‘미치’(바이에 쇼치코)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락사 또는 자연사. 그러다가 호텔을 그만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일이 끊길 때의 불안은 노인에게나 젊은이에게나 고통스럽다. 나는 정규직으로 입사했던 첫 직장을 그만둔 후, 이직이 녹록지 않아서 두번째 회사에 하는 수 없이 인턴으로 이직했다. 그때 월급은 세후 97만 8천 원이었다. 그 회사는 나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것처럼 굴다가도 마지막 면담에서는 합법적으로 계약이 만료되는 것 뿐이라 했다. 알량한 희망 고문이 싫어서, 세번째 회사는 꼭 정규직 직장에 가야만 했다.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의 풍경은 전연령대 여성의 일 풍경을 그린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에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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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알람
"학교에서 직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20대 여성들은 점점 더 매 순간, 플랜 B, 플랜 C를 생각하면서 기획을 한다. 인턴이나 교육생으로서 자신이 원한 직업 공동체에 소속되었다는 일시적 느낌을 얻은 이후 반복적으로 ‘쫓겨나는 일’에 이들은 익숙해진다. 이런 경험을 쌓는 동안 “어쨌든 이동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던 시간은 결국 ‘허구적 감정’만 북돋우는 결과를 낳는다. (…) 그들은 몇 번이고 소속도, 타이틀도, 수입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다시 플랜 D를 가동한다."
-김현미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노인의 플랜 B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호텔을 그만두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서 돈을 받고 손주를 돌봐달라는 자녀의 요구를 미덥지 않아 하는 동료도 있지만, 미치 같은 독거노인은 반드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러나, 구인사이트에서 75세 이상의 노인은 새로운 일감을 조회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고(이 영화에는 미치가 구인사이트에 자신의 나이를 입력했을 때 숫자가 자동으로 ‘0’으로 바뀌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사까지 해야 하는 데 그는 최소 2년 치의 월세를 내야 새로운 집에 입주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처음부터 플랜 B 같은 건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미치에게 플랜 75는 거의 유일한 플랜이다. 대안이 없는 계획은 짜여진 각본과 다름 없다. 2017년에 시작한 대본 작업이 코로나 이후까지 이어졌다고 하고, 미치 역으로 분한 바이에 쇼치코 배우가 1941년생이니 이 영화의 촬영기간에 바이에 쇼치코 배우의 실제 나이는 약 80대 초반일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년의 배우는 이야기 속 노인을 연기하며, 언제고 한 번은 맞이할 죽음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시물레이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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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
'플랜 75' 신청자는 즉시 국가로부터 10만엔(한화 기준 약 902,000원)을 지급받는다. 이 돈은 용돈을 줄 손주가 없는 노인에게는 선도가 좋은 재료로 만든 특상 스시를 주문해서 먹어도, 생의 마지막 날까지 미처 다 못 쓰고 죽을 정도의 비용으로 묘사된다. 돈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죽기 전까지 펑펑 쓸 만한 돈의 기준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플랜 75 신청자들에게 금전적 대가보다 더 공평하게 주어진 보상처럼 보이는 건 시간이다. 이들은 하루 15분 동안 자신에게 배정된 콜센터 직원과 전화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미치에게 배정된 콜센터 직원 ‘요코’(카와이 유미)는 매뉴얼에서 벗어나지 않는 통화를 한다. 늦은 오후 정해진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달라고, 전화를 끊고 나서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오거나 여타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콜센터가 있으니 이용 가능하다고, 또한 마음이 바뀐다면 플랜 75를 언제든 중도 취소할 수 있다고. 미치는 요코에게 하루 15분동안 자신의 인생 얘기를 늘어놓는다. 관객은 전화 너머 그들의 대화를 통해 미치의 생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요코가 그동안 얼마나 진상 고객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보기에 미치는 최고의 고객이다. 자신보다 족히 50살은 어릴 요코를 향한 미치의 태도는 정중하며 그 에티켓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다. 연고 없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시간을 쓴다는 점에 대해 미치는 꼭 필요한 타이밍에 감사를 표현할 줄도 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고령 여성 15여 명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한 말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였다고 한다. 미치도 그런 노인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주체적인 선택도 타인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는 실행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콜센터 상담 노동에 다룬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에 따르면, 콜센터 직원이 고객과 모든 상담이 끝났음에도 고객보다 먼저 전화를 끊는 ‘단선'은 콜센터를 향해 빗발치는 단골 컴플레인 사유 중 하나다. 어느 날의 통화 후, 요코는 미치가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음을 알고 매뉴얼대로 기다린다. 그것은 그들의 공식적인 마지막 통화였고, 미치는 꼭 해야 할 말을 덧붙인다. 미치는 변심하지 않았고, 내일 안락사를 당할 예정이다. 여기까지 요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마쳤다. 그러나 그날 요코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요코는 스크린 바깥에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지난주 월요일, 씨네큐브에서 열린 GV에서 하야카와 감독은 이 장면이 "잔혹한 시스템에 젊은 자신 또한 참여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자 “당신 또한 이런 이야기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관객에게 묻는 일”을 뜻한다고 했다. 이날 첫 번째 관객이 던진 질문과 하야카와 감독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Q. “가장 인간다운 죽음은 무엇일까요?”
A. “한 사람이라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죽음이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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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G Entertainment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이찬혁 솔로 앨범 [ERROR]를 들었다. 이 앨범의 시점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죽음을 앞둔 가상의 이찬혁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죽음 이후 자신의 장례식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이찬혁 자신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세 번째 트랙 ‘파노라마'에서 돌팔이처럼 보이는 의사가 자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릴 때 "이렇게 죽을 순 없어/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라고 노래하다가, 마지막 트랙인 ‘장례희망’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계속 우는데/누군지 기억이 안 나 미안해”라고 너스레를 떤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고 나면, 그가 희망하는 죽음이란, 한 번 스쳐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과 자신에게 중요했던 사람을 포함해 남아있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는 것이다. <플랜 75>에는 다양한 모양의 죽음이 나오지만 장례식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를 향한 애도를 바라는 것조차 사치가 될지 모르는 그런 죽음이라면. 나는 그제야 조금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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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7일, 극장에서 영화 <플랜 75>가 개봉합니다.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국가가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에 얽히게 된 네 사람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은 근미래 SF 드라마. 제75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이 영화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버튼을 통해 이벤트에 응모해주세요. 구독자 총 5분께 예매권(1인 2매)를 증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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