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리얼 페인 A Real Pain>
제시 아이젠버그 연출ㅣ제시 아이젠버그, 키에런 컬킨 출연ㅣ90분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부친 한승원 씨가 전한 바에 따르면, 한강 작가는 기자회견을 정중히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나.” 과연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1948년 4월 3일의 제주를 품고, 한국 근현대사에 얽힌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이야기를 완성한 작가다운 말이다.
영화 <리얼페인>을 본 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오기 이틀 전이었다. 주인공은 할머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할머니의 생가가 있는 폴란드로 여행을 떠나는 사촌지간의 두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널을 뛰는 ‘벤지’(키에런 컬킨) 곁에는 여행 내내 그의 요구와 감정선을 최선을 다해 맞춰주는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가 있다. 둘은 동년배이고 가족사에 관해서는 일정 부분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지만, 한마디로 서로 더럽게 성격이 안 맞는다. 그들은 ‘패키지 여행’을 신청하는데, 거기에는 나름의 주관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가족 중에 홀로코스트에서 탈출한 유대인이 있는 사람, 무슨 생각으로 여행지를 폴란드로 정한 걸까 싶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를 폴란드 관광청이 좋아합니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동유럽의 풍경이 교차하는 와중에, 관객인 나는 극중 여행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나치 독일의 침공 당시 폴란드가 겪었던 저항의 역사를 학습한다. 벤지는 여행 일정 내내 단체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데, 어느 유대인들이 묻힌 무덤 앞에서 가이드를 향해 갑자기 이렇게 폭탄 선언을 한다. 당신의 인솔 하에 여행을 하는동안 한 번도 현지인과 말을 섞어보지 않았어요.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이 이 역사적 장소에 대해 읊고 있는 정보가 아니에요. 우리는 '진짜 고통(real pain)'을 느껴야 해요.
바르샤바, 루블린,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를 순차적으로 관광하는 무리의 동선을 따르며 ‘고통을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나는, 벤지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단지 그것을 알기만 한다는 사실을 확인 받아서 찔린다. 소위 ‘F형(감정형) 인간’의 전형인 벤지의 공감능력은 거리의 동상을 보는 순간에, 기차에 자리를 잡는 순간에, 식당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는 순간에 매 번 발현 되다가 결국 이런 결론을 향해간다. 중요한 건 내가 실제로 그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거기서 진짜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현대의 관객에게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그간 요령껏 잘 피해왔던 세상의 비극을 언론사의 헤드라인을 손가락으로 스크롤 하는 찰나가 아니라 2시간동안 멈추지 않고 보는 체험을 선사한다. 또한, 그런 비극의 영향권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딘가 부서진 인물들을 보며 ‘저 사람이 만일 내 친구였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라는 망상까지 가능하게 한다. 이 영화를 볼 때 조차도 나는 벤지의 입장에 설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벤지와 가까운 데이비드 같은 사람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의 정도만을 가늠하는 쪽에 가깝다.
벤지는 처음에는 꾸준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인의 호의와 전문성을 거절하다가 자신의 문제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에 터뜨리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전부 당황스럽게 만들고야 만다. 가장 당황하는 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이런 상황이 한번 쯤은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을 데이비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과 기분을 ‘진짜가 아닌 것’이라 취급하는 벤지를 바라보는 나는 각자의 사정을 생각한다. 삶이 너무 바쁘다는 사정. 이 정도면 최선이라는 내면의 눈금. 너는 아마 잘 모를테지만 내가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을 극장 바깥으로 나서면 무기처럼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다.
2005년 폴란드를 여행한 후 전세계의 전쟁, 학살 현장,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던 현장들을 방문한 양재화 작가의 기록을 담은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의 부제는 ‘타인의 고통이, 떠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이다. 말하자면, <리얼 페인>의 벤지가 딱 그런 사람이다. 떠나는 이유를 타인의 고통에서 찾은 사람. 영화 속 인물들이 여행지를 폴란드로 정한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물며, 폴란드는 제노사이드의 현장으로만 해석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장소다. 그곳에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 있고, 풍경이 있고, 음식이 있다.
그러나, 우연히 패키지 일행으로 엮이게 된 벤지와 만난 이들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들의 삶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폴란드까지 갔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양재화 작가는 떠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국내외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억압과 비인권적 행위에 분노하고 가슴 아파한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여행이 가르쳐준 것들 덕분이다. 공감도 학습이 필요한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훌륭한 선생이다.” 그리고 가끔은 영화도 훌륭한 선생의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