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5 - 2024.12.01 / 2024 올해의 책 예고 안녕하세요. ㅎㅇ입니다. 지난주에는 다섯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아리아나 그란데, 신시아 에리보 투톱 주연의 뮤지컬 실사 영화 <위키드>, 제77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 제가 사랑하는 도시인 포틀랜드를 가장 매력이 덜한 곳으로 그려낸 <쇼잉 업>은 모두 각각의 충격을 주었는데요. 이번호에서는 두편의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와 <프라블러미스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또, 넷플릭스의 신작 드라마도 소개합니다.
12월의 시작과 함께 예년보다는 조금 일찍이 '2024 올해의 책' 결산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재미를 기준으로 3권의 책을 골라보았는데요. 초성만 보고도 아실 수 있을까요? 제가 고른 책들의 주제는 각각 잘 못 나가는 작가, 예쁜 쓰레기, 교통 지옥인데요(???)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 12월 3일 화요일에 업로드 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들으실 수 있습니다.
01.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무기한 연기, 기다림, 번아웃, 빚진 마음"
02. 스파이가 된 남자
"알쓸신잡과 위트를 겸비한 호감형 남성 노인의 등장"
03. 플라블러미스타
"틸다 스윈튼, A24가 또"
|
|
|
01.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메릴스트립
|
|
|
© 서울독립영화제(siff) 웹사이트
메릴 스트립의 영화를 보고 자라 영화인이 된 박효선 감독은 어느 날 동시대의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인터뷰한 후 마지막 인터뷰이가 메릴 스트립이 되기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를 개시한다. 그는 2016년 트위터에서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고, 동료 여성 영화인들이 원치 않게 업계를 떠나는 것을 보았고, 메릴 스트립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자신이 출연하고 (가능하다면) 메릴 스트립도 출연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자 한 것이다. 2019년 연말에는 제작비 마련을 위한 텀블벅 펀딩을 열었다. 내가 이 영화를 알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펀딩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박효선 감독은 펀딩을 무사히 마무리한 후, 지인이 있는 캐나다에 잠시 머물렀다가 메릴 스트립과의 만남을 시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 즈음 팬데믹이 터진다. 북미 지역에서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 및 폭행사건이 연일 뉴스에 보도 되기 시작한다. 메릴 스트립이 당시 촬영 중이던 영화 <더 프롬>(2020) 또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다. 박효선 감독이 머무르던 캐나다의 국경은 일시 폐쇄된다. 덕분에 3월 8일 ‘여성 행진의 날’ 기념 캐나다 토론토(로 추정되는) 거리 행진 현장을 촬영할 수 있었지만,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의 개봉은 후원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무기한 연기된다.
어떤 종류의 기다림은 내가 그것을 기다린 적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잊게 만든다. 2024년 11월 30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는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를 보러 가는 날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몇 년간 때로는 이 프로젝트의 진척도가 열렬히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잊고 지냈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문라이트> 때부터 영화를 찍고 있구나.” 다큐멘터리 후반부, 박효선 감독의 행선지는 LA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이다. 거기에는 영화인들의 호화로운 표식이 있는데, 박효선 감독의 시야가 닿는 곳은 2017년 아카데미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부터 2024년의 <오펜하이머>까지다. 7년 여의 시간이 영화 속에서 또 영화 밖에서 흐른 것이다. 여기에 맞닿아 있는 건 다름 아닌 ‘번아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박효선 감독에게는 지쳐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이 영화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은 박효선 감독이 더 좋았고, 그만큼 빚진 마음이 들었다. 다큐멘터리에는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 공감하며 목소리를 내기를 자처한 한국의 여성 배우들의 진솔한 모습, 영화 기자와 그의 지인들이 메릴 스트립에게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다. 이론부터 실전까지, 불가능해보이는 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거의 모든 게 들어있는 셈이다. 보는 내내 손에서 조금 땀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는 이 손을 내밀어서 내가 잡아야 할 다른 손들을 떠올렸다.
02.
스파이가 된 남자
#넷플릭스 #8부작드라마 #첩보 #코미디
|
|
|
은퇴한 건축학 교수 ‘찰스’(테드 댄슨)는 채광이 좋고 모든 게 오와 열을 맞추어 정리되어 있는 집에 산다.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노년의 삶이지만 실은 그는 1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삶이 무료해졌음을 느끼는 중이다.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종이 신문을 스크랩하던 그는 신문에서 우연히 ‘75살~85살, 남자, 최신 기기를 잘 다룰 것’이라는 구인 공고를 접하고 면접장으로 향한다. 면접에 가뿐하게 통과한 그가 앞으로 할 일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실버타운에 탐정이 되어 잠입하는 것이다. 의뢰인은 그 실버타운에서 고가의 목걸이를 분실당한 어머니-의 아들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어머니와 동년배인 노인이 현장에 머무르는 게 가장 그럴듯하므로, 찰스는 고민 끝에 입주한다. 첩보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눈 앞의 모든 장면이 녹화되는 스파이 전용 안경을 쓰고서. 회차가 거듭되면 손목에는 진짜 롤렉스 시계도 찬다.
이 모든 게 찰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선택지였던만큼 그는 초반부터 의욕을 보인다. 관계를 쌓으며 실버 타운 입주민들의 캐릭터를 알아가고 수상한 점을 포착하며 조각을 맞추어나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가 알쓸신잡과 위트를 겸비한 호감형 남성 노인이라는 건 꽤 중요해보인다. 실버타운이라는 커뮤니티에는 늘 주위에 사람이 몰려드는 노인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노인도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정력적으로 사랑을 향해 돌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체적 노화라든가 심리적 문제를 감당하며 싸우는 중이다. ‘스파이가 된 남자’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향해 자신의 일부분을 헐어서 내어보이는 것이다. 한 걸음 떨어져 예리한 관찰자의 시선만 견지해서는 자신이 원하는만큼 다른 사람들이 가진 비밀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 뿐 아니라, 원래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찰스를 고용한 사립 탐정, 그가 머무르는 실버타운의 총 책임자, 그의 딸은 셋 다 모두 동년배의 여성이다. 그들은 찰스와 적극적으로 공조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할 때도 있다. <굿 플레이스>(2016~2019)와 <브루클린 나인-나인>(2013~)을 연출한 마이클 슈어의 차기작이고, 두 시리즈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스파이가 된 남자>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전작들만큼 이 드라마와도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실버타운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마이클 슈어가 만든 필라테스 센터, 대형 마트, 혹은 피아노 학원을 배경으로 하는 온갖 드라마들을 보고 싶다.
03.
프라블러미스타
#넷플릭스 #A24 #영화 #이민자-아티스트
|
|
|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프라블러미스타 Problemista>에서는 모래시계가 언제 뒤집혀버리는지가 중요하다. 특히,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온 주인공 ‘알레한드로’(훌레오 토레스)는 모래시계가 뒤집어지는 순간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이민자 출신의 아티스트 지망생이기 때문이다. 알레한드로는 장난감 디자이너로 취업하고 싶지만 당장은 체류 기간이 만료된 탓에 미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있다. 취업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되므로 고객을 냉동 상태로 얼려서 미래에 깨어나게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냉동 보존 회사에 급히 취업해버린다. 그리고, 미국은 물가상승률을 보고 뒷목을 잡기 딱 좋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고객이 알레한드로가 일하는 회사에서 자신의 남편을 계속 얼리려면 살아 있는 반려자(이자 냉동인간의 보호자)로서는 돈이 필요하다.
‘보비’는 살아있을 적 오직 계란만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였다. 그가 계란에 꽂힌 이유는 진작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 그렇지만, 괴짜같은 구석이 있는 비평가 ‘엘리자베스’(틸다 스윈튼)는 예술가인 남편 보비가 얼었다 깨어난 미래에는 당신이 그린 그림들의 진가를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봐줄거라고 격려한다. “난 미래로 갈거야. 뭐가 날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거기선 내 달걀을 이해할지도 몰라.” 보비가 얼어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무명의 예술가가 ‘죽은 듯 살아있는 삶’을 연장시키는 데에 나름의 역할을 한다. 동시에 위기의 순간에 알레한드로를 프리랜서로 고용함으로써 미국 비자를 취득할 확률을 높여주고, 그가 이민자 출신의 아티스트로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간을 독특하게 연장시킨다. 빨갛고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서. 그러니까, 틸다 스윈튼이 또 해냈다. <프라블러미스타>의 배급사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에서 관객의 손을 잡고 활보하는 A24고, 스크린 속에는 새빨간 머리를 한 틸다 스윈튼이 있는 것이다. 보기 전에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이만한 조합이 없다.
영화 자체도 무척 감각적이다. 외신 기사에서는 제 2의 ‘미셸 공드리’(<수면의 과학>, <무드 인디고>)의 출연을 언급하는 정도다. 이 이야기 속에서 미국에 살고 싶지만 체류 자격이 박탈되어버린 사람들 즉,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진 사람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져버린다. 각자의 나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더없이 신비롭고 허무하게 증발된다. 아마도 이것은 이 영화가 가장 공들인 CG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냉동인간이 되는 장면의 시각 효과는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악하게 연출되어있다. 새로운 세계로의 자발적인 입장을 원치 않는 추방보다 더 중요하게 다룰 필요는 없을 테다. 물론, 이 또한 연출가의 의도일 것이다.
|
|
|
COPYRIGHT © CONTENTSLOG. ALL RIGHTS RESERVED.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