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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서른 여섯 번째 생일의 유일한 일정은 여의도 국회 앞에 가는 것이었다. 내가 자리 잡고 앉은 구역에서 주최 측은 국회 현장 연결이 고르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바로 내 앞줄에 앉아 있는 분이 소장한 기기의 LTE가 잘 터지는 바람에 그 분이 한동안은 ‘간이 인간 스마트폰 거치대’ 역할을 했다. 대여섯명이 빙 둘러서 중계를 지켜보는동안 “두 표가 모자르대요”, “국힘 전부 투표 안 하고 퇴장하고 있다는데요?” 같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며 탄식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정족수 미달로 부결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제부터 장기전인가? 그럼 12월 14일은 오늘보다 더 추울 거 아냐?’ 같은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다. 도대체 왜 추워질 때마다 이 난리인가. 사계절의 구분이 점점 흐릿해지고는 있지만, 8년 전 겨울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던 날의 시린 공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무튼, 데모>의 정보라 작가는 투쟁하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기후변화는 정신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말부터 챙긴다. 여름에는 아스팔트 바닥이나 돌이 깔린 보도의 지열과 복사열이, 그것은 그것대로 싸우는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2023년이 토끼해라서 장애인 야학운동을 하시는 동지들이 2022년 말부터 토끼 인형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나는 피켓과 함께 토끼 인형을 소중하게 들고 토끼와 함께 선전전을 했다. <저주토끼> 작가로서 자랑스러웠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와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에 참여했던 기록은 그가 쓴 부커상 최종 후보작과 이런 식으로 포개어진다. 나는 시위에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조금 전까지 거리에서 머리에 ‘투쟁’, ‘OUT’ 같은 머리띠를 질끈 맨 빙키봉(토끼가 신나서 뛰는 모습을 의미하는 ‘binky’라는 별명을 가진 뉴진스 응원봉)을 든 무리를 보았던 게 여전히 생생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 외에도 정보라 작가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전쟁 반대 시위에서 러시아어로 전쟁을 중단하라고 외친 일(저자는 러시아 문학 전공자다), 오체투지를 처음으로 해 보았던 날의 기억(“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오체투지는 보는 쪽보다 직접 하는 쪽이 쉽다”)을 들려준다. 물론, 그에게도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투쟁의 자리에 참여하는 대신 “그저 SNS로 계속 소식을 확인할 뿐” 이었던 날들도 있다. 세상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지 않다면 이 책은 애초에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데모>는 얼룩진 현대사의 모음집이다.
2017년부터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에세이 시리즈 ‘아무튼’이 무언가를 주체할 수 없이 달뜬 마음으로 애호하는 사람에게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왔다면, <아무튼, 데모>는 제목부터 낯선 조합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4년 전 <아무튼, 반려병>을 펴내며 이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조합임을 보여준 적이 있다. <아무튼, 반려병>의 서문에서 강이람 작가는 말한다. “‘아무튼 시리즈’가 표방하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는 대개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한 취미, 관심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각종 잔병들이 ‘나를’ 선택해왔다. 재작년에도 골골거렸는데, 작년에도, 올해도 비슷비슷하게 계속 아팠습니다, 라는 경험치가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혹은 의도해서 만든 능동적인 세계가 아닌, 잔병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태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인생의 ‘아무튼’을 논하자면 이 수동태의 세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망해가는 혼돈의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수동태의 세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상황의 통제권을 쉽게 내어주지는 않지만 마땅히 가야할 곳을 향해 나아간다. <아무튼, 데모>의 마지막 챕터 제목이 ‘유토피아’인 것 처럼.
02.
조명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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