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오늘 아침까지, 친구의 제안으로 64인치 TV가 있는 서울의 에어비앤비를 대여해서 유튜브 생중계로 코첼라를 보았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3년전부터 뮤지컬 얘기를 하면서 인터넷 친구로만 지내다가 2017년 콜드플레이의 첫 내한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다. (콜드플레이가 ‘Yellow’ 무대를 하다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음악을 멈추고 10초간 묵념을 하자고 관객에게 청했던 바로 그 전설의 공연이다.)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음악 취향은 거의 겹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온갖 락페스티벌을 다녔고 국내 밴드부터 브릿팝까지 꿰고 있는 그와 달리 나는 쭉 케이팝 외길만 걸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돌고돌아 그 친구도 케이팝을 듣게 되었고, 내가 사랑에 빠진 음악들로 채워넣은 플레이리스트의 전곡 재생 버튼을 눌러보면 그 음악들의 출처는 마치 지구본을 돌리듯 여러 국경에 걸쳐 있게 되었다. 함께 또 따로 챙겨 본 무대들은 다음과 같다.
Day 1. Tyla - LISA - Parcels - Lady Gaga
Day 2. Weezer - Jimmy Eat the world - Japanese Breakfast - Blonde Redhead - Gustavo Dudamel & LA Phil - Charli xcx - Clairo - ENHYPEN - Green Day
Day 3. Hope Tala - JENNIE - Post Malone
🌴 (1)55분간 리사(LISA)는 총 5벌의 착장을 보여주었다. 게임 카드를 뽑으면 서로 다른 캐릭터가 스크린에 펼쳐지면서 새로운 자아들이 등장하는 식으로 무대 위 챕터를 구분했는데, 이는 올 2월에 발매한 리사의 앨범 타이틀이 ‘Alter Ego’(또 다른 자아)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잦은 착장 교체로 중간중간 딜레이가 없진 않았는데 55분 라이브에서 이렇게까지 옷을 갈아입는 것이 매우 대담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최근에 내가 이제껏 본 드라마 중 가장 더럽고 가장 골 때리는 작품인 HBO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를 보았는데, 4월 초에 종영한 시즌 3에서 리사는 태국의 어느 호화로운 호텔의 직원이자 건강 코치로 등장한다(태국어와 영어를 오가는 연기를 선보인다.) 드라마 속에서는 역할상 흑발을 깔끔하게 묶고서 수수한 스타일을 고수하는데 드라마에서 못 입은 옷을 코첼라에서 다 입는구나 싶었다. 배우 데뷔를 제법 성공적으로 치러낸 리사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충분히 저력을 보여주었다.
🌴 (2)첫 날의 헤드라이너였던 레이디 가가(LADY GAGA)는 앵콜까지 꽉 채운 1시간 50분간 무대를 보여주었다. 2025 코첼라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만 한다면 #GAGACHELLA 가 될 것이다. 나는 무대를 보다가 친구에게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레이디 가가가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타이밍이에요?” 라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욕심 내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 욕심에 대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책임을 지게 만들었을까? 이미 가디언, 롤링 스톤즈 등 외신들도 이번 코첼라 공연에 만점을 주었다. 나는 이 무대를 다시 보기를 포함해 총 3번 정주행을 했고, 그 결과 코첼라 이후 이어질 그녀의 [MAYHEM] 발매 기념 월드 투어 일정 중 유일한 아시아 국가인 싱가포르에서의 콘서트 관람을 고려하는 중이다(?)
🌴 (3)올해 코첼라의 가장 독특한 라인업 중 하나는 LA필하모닉(LA Phil)이다. 적당히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시간대의 야외 무대에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올랐고, LA 필하모닉에서 지난 17년간 지휘자와 음악감독을 역임했던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함께했다. 검은 수트에 검은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그는 엔딩 무대에서 힙합 래퍼인 LL cool J와 마주보고 각자 마이크와 지휘봉으로 배틀을 뜨는 장면을 선보였다. 막스 리히터 버전의 사계 봄 1악장처럼 클래식한 사운드에 집중하게 만들다가 가스펠 콰이어가 빼곡히 무대를 채우며 좌중을 압도하기도 했는데, 어떤 아티스트의 무대보다도 지루하지 않은 구성이 돋보였다.
🌴 (4)클레어오(Clairo)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의 대표 진보 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깜짝 등장했다. 적어도 몇 만 명의 관객 앞에서. 생중계를 보는 인원을 포함하면 그 이상 앞에서. 그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향해 폭망한 세상에서도 정의를 추구하자는 약 5분간의 오프닝 스피치를 했다.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한 곡을 버려야 하는, 많게는 두 곡 정도의 메들리를 선보일 수 있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줘야 했던 셈이다. 클레어오는 왜 그런 결단을 했을까?
2023년 코첼라 티켓과 숙소, 항공권을 결제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1,260원이었고, 2024년에는 1,340원이었다. 나는 2년 연속 코첼라에 다녀오면서 요란한 환율의 정체를 그곳에서 하루에 한 잔씩 꼭 사 먹은 레몬에이드 한 잔이 얼마인가로 실감했다. 2023년에는 1만원대 후반이었던 것이 2024년에는 2만 3천원이 되었을 때, 중간중간 수분을 보충해야 하니 그것을 마시긴 하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지난주에는 원달러환율이 1,486원을 찍어버렸다. 트럼프의 공격적인 관세 정책에 중국이 보복 관세 부과로 응수한 탓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나날이 세상은 나빠져만 가는가? 레몬에이드를 기분 좋게 마시는 일은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 이렇듯, 버니 샌더스는 “기후 위기를 허구라고 말하는 대통령은 위험한 인물입니다”로 시작해서 무능하고 변덕스러운 지도자 때문에 현재 미국 사회와 그 자장 안에 속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건드렸다. 전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마친 후에는 “클레어오는 탁월한 밴드일 뿐 아니라 그가 해온 위대한 행동들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는 멘트로 오늘의 주인공을 호명했다. 버니 샌더스가 퇴장하면서 클레어오와 댄서들이 입장하는 전환점의 카메라 워킹도 무척 매끄러웠기에. 일단 듣던 음악을 마저 다 듣고 세상 걱정을 하자.
"앞서 알고리즘을 타고 사랑이 퍼져나간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매일의 알고리즘에는 불순물이 끼어있다. ‘라이트 팬’과 ‘진성 팬’을 가르는 구분선은 여기서 생긴다. 내가 누군가의 라이트 팬이라는 고백에는 지금부터 최애와 연관된 인지적 부담을 덜 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라이트 팬으로 남으면 최애를 둘러싼 여론의 오해와 억측을 교정하지 않아도 된다. 불순물을 바로바로 눈앞에서 치워야 할 의무를 가진 진성 팬과는 다른 방식의 덕질을 해보겠다는 것. 이는 팬 생활 속 과업의 비중을 덜어냄으로써, 자신을 삼킬지 모를 번아웃에서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반대로 할 일을 충실히 수행해 오던 진성 팬은 어느 순간 자신의 근태 소홀과 생산성 저하의 상태를 마주한다. ‘케이팝적 번아웃’이 찾아오는 것이다. 케이팝적 번아웃은 주로 “탈케(탈-케이팝)하고 싶다”는 관용구를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탈케는 퇴사가 아니므로 그만둘 방법을 몰라 수렁에 빠진 팬들은 다시금 ‘어덕행덕(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이라는 사자성어 앞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