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고래ㅣ2025년 6월 25일 출간
때로는 개인적인 불호가 직업인으로서의 돌파구가 된다. 제3회 청룡시리즈어워즈 예능·교양 부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는 자칭 “테스트 냉소주의자” 권성민 PD의 연출작이다. MBTI 얘기가 길어지면 바로 따분해지는 나는 <더 커뮤니티>에 곧장 몰입 했는데, 그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탈-MBTI’를 향한 거대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권성민 PD의 책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를 보면, 그 또한 MBTI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는 그 역할을 긍정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담론이 등장하는 자리마다 빈틈없이 이분법이 밀려들어 (...) 이분법의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MBTI가 프로그램 기획 당시 힌트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더 커뮤니티> 출연진들은 사전 테스트를 통해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차원을 조합해 사상 점수를 부여받은 후 한 공간에 입장한다. 2024년 2월, 출연진들뿐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배포된 ‘사상 검증 테스트’에는 1년간 총 120만 개의 데이터가 누적됐다고 한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테스트에 참여할 수 있는 페이지가 한동안 바이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에 따르면, <더 커뮤니티>의 기획 의도는 한마디로 다음과 같다. “서로 만나지 않는 사람들이 조우하는 판을 깐다.” 서로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제21대 대선의 ‘1찍’과 ‘4찍’, 이스라엘-하마스 간의 대립을 각기 다른 용어로 부르는 이들이다. 너무 극단적인 사례들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나에게 그 사람을 만날 용기나 에너지가 남아 있는지도.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라던 우리는 지쳤고, 설득에도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렇게 인류애를 잃은 폐허 위로, 사회학 연구자도 정치 평론가도 아닌 예능 프로그램 PD가 동료 시민들을 위한 세심한 교양서를 내놓았다. 특정 진영이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 대신,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회학적 개념들을 부드럽게 풀어보는 일에 집중”하며 극단적으로 나와는 달라 보이는 여러 차원과 스펙트럼을 넘나들자고 요청한다.
<더 커뮤니티>를 재미있게 본 시청자라면 한 번쯤 제기했을 의문에 대한 연출자의 견해도 책에 들어있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들은 왜 하나같이 돈을 잘 버나? ‘계급’ 얘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던 권성민 PD 또한 전체 출연진의 연봉이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지나치게 높아서 당황스러웠던 순간을 돌아본다(p.174). “데이트 비용을 더 내는 남자가 섹시한 것은 자연스럽다”는 토론 주제로 삼기에 너무 얄팍한 주제가 아닌가? 이 책은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자를 ‘연루’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p.213). 출연진 중 기혼자 남성은 4명이나 되지만 기혼자 여성은 한 명도 없다는 걸 보면 다양성이 결여된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제작진은 어떻게든 기혼자 여성을 섭외하고자 노력했던 전적이 있다(p.220). 이 프로그램은 왜 페미니즘의 반대 항에 ‘이퀄리즘’을 두었는가? ‘성차별주의’, ‘가부장주의’ 등 여러 대체어를 후보에 올렸음에도 결국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아예 한 챕터를 할애해서 쓰고 있다(p.193).
권위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권위주의를 지나치게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이 책을 좋아할 거다. 왜 그게 그렇게 싫은지에 대한 이유도 이 책을 통해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2025년, 정치 지형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서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의 마지막 문장은 “그들은 피해자와 대화했다.”(p.349)이다. 내게는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임팩트가 큰 마지막 문장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여기서 끝난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고.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보니 역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재확인하는 일과 상대가 ‘왜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해볼만한 맥락을 얻는 일은 동시에 벌어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