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ㅇ 제가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목차가 흥미로워서예요. 이 책에 목차가 좀 많습니다. 총 69개인데요. 그 자체로 어떤 글쓰기 워크숍의 커리큘럼 같기도 하죠.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할 만한 지점들이 목차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하지만 답이 주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오늘 먼저 이야기 해보고 싶었던 건, 최근 각자 자전적 에세이라 불릴 수 있는 글을 쓰면서 어떤 고민을 했는가 입니다.
미화리 저는 얼마 전에 웹진 림(LIM)에서 <세상이 무너져도 알고 싶은 것> 연재를 마쳤는데요. 저에게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걱정부터 가까운 걱정까지 여섯 편에 나누어 썼어요. 평소에 오만 쓸데 없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주로 거대한 일에 대한 걱정이 커요. 이를테면, '지구가 갑자기 멸망하면 어떡하지? 소행성이 충돌해서 내일 당장 사라지면 어떡하지?' 뭐 이런 것들이요.
그런데 그게 단지 걱정에 그치려면, '소행성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 했어요. 소행성 충돌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또 과거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지. 자료 조사를 통해 알게 된 팩트를 제 글에 인용하면서, 그 결과 나는 지금보다 걱정을 덜 해도 되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곤 했어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가 어디까지 모른다고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ㅎㅇ 이 책에서 그런 고민을 짚어준 지점이 있었나요?
미화리 '20. 전문가가 되지 마라: 전문가가 되라' 챕터에서 낸시 선생님은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면서 쓰지 말라고 하는데요. 제가 모르는 것에 대해 자료를 찾아 본 후 인용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자료를 이어 붙이기만 하고 '통계에 따르면 이렇다'라고 써나가는 건 에세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모른다고 써야 하는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ㅎㅇ 미화리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걱정이 소행성이 충돌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거였다면, 가장 가까운 걱정은 무엇이었나요?
미화리 여성으로서의 걱정이 가장 마지막이었어요.*
* "(...) 나는 비슷하게 불안해진다. 내가 유난스러운 걱정 전문가라서일까? 아니,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화 <세상이 무너져도 알고 싶은 것> 중에서)
ㅎㅇ 그럼 이제 다른 걱정은 없나요? 연재에서 꼽아주신 여섯 가지 말고요.
미화리 걱정이야 언제나 너무 많지요.
ㅎㅇ 그런 식으로 한 가지의 불안에 집중하게 됐을 때 글을 쓰세요?
미화리 전혀 안 쓰죠.
ㅎㅇ 아니 근데 이 책의 원제가 'Memoir as Medicine(치료제로서의 메모와)'잖아요. 'Memoir(메모와)'는 영미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우리말로 하면 '회고록'에 가까울텐데, 이 책에서는 '자전적 에세이'라고 번역 되어 있죠. 돌베개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작업하면서 '메모와 = 자전적 에세이'라고 나름의 정의를 내린 것 같아요. 물론, 언제나 명확하게 세부 장르 구분을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더 큰 비중으로 담아내는 일이 치료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일거고요.
미화리 많은 분이 아픔과 슬픔을 글을 쓰면서 해소해 나가려고 하시잖아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글쓰기 책도 실제로 많고요. 어느 정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쓰기를 통해 정리 되긴 하겠지만, 저는 불안이나 걱정을 글을 쓰면서 해소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됐어요. ㅎㅇ님은 최근에 어떤 고민을 하셨어요?
ㅎㅇ 저는 앤솔로지 에세이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편않, 2023)에서 <어느 유사 서평가의 일일> 편을 썼어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감정이든, 하는 일이든, 그게 뭐가 됐든 지금 사회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이름에 속하지 않은 것 같다고 감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감정으로 예를 들어보면, 이게 슬픔은 아닌 거예요. 슬픔을 느끼는 상태이긴 하지만 이걸 슬픔이라고만 표현하긴 싫은 것. '그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는데?'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글을 쓰는 것 같고요. 도서 팟캐스트를 하거나, 책에 대한 서평을 쓸 때, 내가 서평가야? 북 큐레이터야?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둘 다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유사 서평가입니다'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왜 그 정의를 내렸는지에 대해서 썼죠.
유사가 있으면 진짜가 있을 거잖아요? '요네하라 마리'라는 일본의 서평가가 있는데 그분은 제 입장에서 진짜거든요. 그래서 '찐 서평가가 있기 때문에 나는 찐이 될 수 없다'라는 그런 논지를 펼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그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건, 제가 직업적인 기준으로는 눈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런 눈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을 보면 동종 업계에 있더라도 그 사람과 저를 직업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생각 한다는 거예요. 이미 서평가가 있기 때문에 나는 서평가가 될 수 없다는 거죠.
미화리 서평가는 세상에 단 한 명이어야 하는 거예요?
ㅎㅇ 그러니까요. 웃기죠. 그만큼 서평가로 인정하는 사람이 제 안에 많지 않은 거죠. 요네하라 마리처럼 너무 딱 들어 맞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이상한 고민에서 한 편의 글이 시작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