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고 있는 게 너무 힘들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싶어하고, 몇 종의 시사
뉴스를 보고 있는 게 너무 힘들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싶어하고, 몇 종의 시사 뉴스레터를 구독하며, 자기만의 '필터 버블'에 틈틈이 실금을 내려는 듯한 친구들이 가장 먼저 그런 말을 꺼냈다. 사건사고와 비보를 전하는 뉴스에서 튕겨나가지 않은 채로 제자리를 지키기. 요즘은 그게 가장 지니기 어려운 삶의 처세술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세상에 헛소리가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기댈 구석이 되어 주었던 콘텐츠들을 소개하겠다.
<오디오 진정제: 무엇이든 읽어보세요>는 평균 10분동안 클래식, 오페라, 애니메이션 OST를 배경 음악 삼아 무엇이든 낭독해주는 팟캐스트다. 낭독을 번갈아 도맡는 배창복, 이상협 아나운서는 KBS 소속으로, 완독 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은 글들을 골라서 대신 읽어준다. "길에서 주운 전단지부터 표준 한국어 대사전까지 무엇이든 읽어드립니다"는 안내 멘트는 거짓이 아니다. 첫 화를 재생하면 '서울 성동구 마을버스 01번 버스 노선도'와 '서울구치소 2017년 4월 마지막 주 주말 재소자용 식단'을 두 사람의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저음으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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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오디오진정제
"안녕하세요. <오디오 진정제: 무엇이든 읽어보세요>의 배창복, 이상협입니다. '무엇이든 읽어보세요'는 무엇이든 읽어드립니다.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저음으로 삶에 지친 여러분을 진정시켜 드립니다.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에서 들으시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시는 것도 권장합니다."
- <오디오 진정제> 오프닝 멘트 중에서
그들은 왜 첫 화부터 다름 아닌 감옥의 먹거리를 낭독했을까? 돌이켜보면, <오디오 진정제>가 시작 되었던 2017년의 대한민국은 헛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제 18대 대통령이 열 세가지 혐의로 구속 되었고, 언론은 그 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루었으며, 이후로도 사회 곳곳에 퍼진 그 일의 여파를 줄지어 전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은 특정인에 대한 똑같은 뉴스를 전하는 대신, 그가 먹을 밥 이야기를 하는 걸로 잠시 꽉 막혀 있던 시민 정서를 환기했다.
한편, <오디오 진정제>는 KBS의 지원을 받아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사내 공모를 통해 생겨났는데, 같은 해 KBS가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총파업에 들어서면서 잠시 업로드를 멈추기도 했다. 오랜만에 올라온 컴백 에피소드에서 두 사람은 전국 언론노동조합 KBS 본부 조합원 일동의 'KBS 새 노조의 선언문' 전문을 낭독했다. 언제나 그랬듯, 분명하고 또박또박하게.
가끔 사람들은 자신에게 바로 이런 게 필요했다는 걸 그게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무리 나쁜 뉴스라도 <오디오 진정제> 버전으로 들으면 좀 참을만하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팟캐스트가 하는 일은 분명했다.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저음으로 잡소리에 지친 우리들을 진정시켜주는 것. 한달도 되지 않아 이 팟캐스트가 오디오 플랫폼 중 하나인 팟빵 문화예술분야 1위에 등극 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모든 오디오 플랫폼에서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말이다.
<오디오 진정제>를 향해 동시에 터져 나오던 사람들의 반응은 '재능 낭비'에 관한 것이었다. 아나운서의 성대가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위해 기능적으로 쓰이기만 하는 지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를 '쓸고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이 말은 '쓸 데 없이 고퀄리티'의 줄임말인데 몇 해 전에 유행했으며 지금은 많이 낡은 말이 되버렸다. 쓸모 있는 일만 해야 한다는 강박은 그 사이 쓸 데 없는 일을 벌여도 괜찮다는 너그러움으로 바뀌었다. 상대를 향해.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향해. 금정연 에세이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는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말들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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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첫 장부터 '존맛'과 '존잘'을 예시로 들며 왜 사람들이 이런 말을 즐겨 쓰는지 분석한다. "새로운 건 '존나'도 아니고 '버티기'도 아니다. 그 둘의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다." 그런가 하면 본래 주식 용어였던 '손절'이 어느새 인간 관계를 이르는 용어에서 더 자주 쓰인다는 점을 두고, "모든 이별은 슬프다. 어떤 이별을 손절이라고 바꿔 부르는 세태는 더 슬프다."면서 비수를 꽂는다. '많관부'도 빼놓을 수 없다. 내게 있어 뉴진스의 데뷔곡 'attention'은 가장 세련된 방식의 '많관부'처럼 들린다. 체감상 만 번쯤 들은 것 같은 그 노래가 가끔 섬뜩해지는 이유다. 관심이 돈이 되는 사회에서는, '나에게 관심을 좀 달라'는 메세지를 표면적 관종이든 은밀한 관종이든 모두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변주해서 외치고 있다. 다음에 할 말을 고르다가 문득 생각한다. 많관부를 뉴진스만큼만 산뜻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의 대부분이 사라질텐데!
'스불재'라는 말이 없어지려면 애초에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재앙이 계속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여전히 내 일상에 존재한다는 게 슬프다. 언젠가 X(구 트위터)에서 일만 회 이상 공유 되었던 나의 게시글에는 '발등튀김'이라는 말이 쓰여있었다. 내 인생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식으로 굴러간다면, 단어의 창시자인 동시에 그 단어를 완벽하게 잊어버린 사람이 될 수 있을텐데. 문제는 스불재나 발등튀김을 남용하는 데에 있지 않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있는 '틀딱' '맘충' '노키즈존'은 우리 중 누군가가 만든 말이자 우리를 만든 말이다. 한 번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거나 자조가 녹아있는 신조어보다, 많은 이들이 암암리에 쓰고 있기 때문에 유행이 잦아들 기미가 없는 혐오의 언어가 더 확실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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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는 헛소리가 가득한 세상에 도착한 영화다. 고등학생 주인공 '루비'는 의무적으로 하나씩 들어야 하는 동아리 중 합창단에 지원 하지만, "Music is my life"라는 타이포를 문신으로 몸에 새길 부류의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합창단의 'Mr. V' 선생님은 음악 영화 속 선생님 캐릭터들이 으레 그렇듯 좋은 면과 까탈스러운 면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합창단의 첫 수업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일을 위한 용기가 부족해 도망쳐버린 루비를 향해 Mr.V는 이렇게 말한다. "할 말이 없는 예쁜 목소리는 차고 넘쳐. 너는 할 말이 있니?" 이는 단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꼭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너무 자주 또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피로가 묻어 있는 어른의 말처럼 들린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가진 음악적 잠재력을 알아보는 반가움을 가진 그는, 꼭 그만큼이나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많이 들으며 사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으로부터 노래할 때 기분이 어떻느냐는 질문을 받은 루비는 수어로 답한다. 청각 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CODA(Children of deaf adult)'인 그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대답할 수 있는 방식을 고를 권한이 있다. 그 순간 영화에는 수어를 풀이해주는 자막이 깔리지 않으므로, 우리는 루비가 노래할 때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관객인 우리와 루비네 가족은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의 중반부가 넘어갈 때까지도 가족들은 루비가 음악을 향해 품고 있는 애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뱃일을 해온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푼돈 취급을 받는 상황마다, 루비가 통역해 준 어시장 기득권자들의 헛소리를 듣고서야 열심히 답변을 마련한다. 결국 루비의 엄마, 아빠, 오빠에게는 점점 루비의 도움 없이도 커뮤니케이션을 해내야 하는 때가 온다. 아무리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을 돌려주는 타이밍을 더이상 유예하지 않기 위해, 이제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전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잡소리에 지쳤다. 그래서 때로는 안 본척, 안 들리는 척 하면서 매사에 심드렁해진다. 그렇게 해야만 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디오 진정제> 청취자들이 팟캐스트 진행자들에게 요청한 낭독 중에는 '양 100마리 세기'가 있었다. 진행자들이 양 100마리를 세는 데에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69번째 양을 들을 때쯤 생각했다. 내일 어떤 헛소리를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를 삼키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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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에 언급된 콘텐츠
•팟캐스트 <오디오진정제>(20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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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는 못다 한 이야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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