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던 상대를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심상찮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밴드
가만히 있던 상대를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심상찮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밴드 실리카겔의 'NO PAIN'을 들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예의 있게 시작해서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한다. 그렇게, 이 노래는 정말 어떤 행동을 하게끔 만든다. 그건 '(실리카겔의 보컬처럼) 노래 따라 부르기'이면서 곧 '(아까부터 듣고만 있다가 이제부터) 노래하기'다.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 우리만의 따뜻한 불, 영원한 꿈, 영혼과 삶 / 난 오늘 떠날 거라 생각을 했어 날 미워하지 마"
- 실리카겔 'NO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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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IN' MV
한국어에서 예의가 정말 그렇게까지 중요할까? 실리카겔 음악을 주구장창 듣던 나는 최근 아주 흥미로운 두 권의 신간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먼저, 전주경의 《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읽습니다》이다. 이 책의 제목은 UX 라이터로서 웹사이트나 모바일 앱에 쓰이는 모든 텍스트를 관장하는 일을 하는 저자와 그의 동료들이 실무를 할 때 자주 하는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딱딱한 문어체 대신 "가벼움, 휘발성, 비전문적, 낮은 신뢰감 등의 한계"를 가진 구어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우리는 '다음' 버튼이나 '동의' 버튼이나 '확인' 버튼을 누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스크린에 어떤 글이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버튼을 클릭할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누르고 싶은 버튼'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 일은 조금 복잡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콘텐츠 로그>에서 새로나온 책 광고를 할 때 [더 자세히 보러가기]라는 버튼과 [읽고 싶어요!]라는 버튼 중에 구독자들은 어느 쪽 버튼을 더 많이 클릭할까? 광고를 하고 나서 출판사(광고주) 측에 공유하는 주요한 지표 중 하나는 '몇 사람이나 이 버튼을 클릭했는가'이므로, 나는 본문의 내용 만큼이나 코너의 마지막에 배치될 버튼 하나도 허투루 만들 수가 없다. 버튼의 디자인은 네모와 동그라미 중에 택 1을 해야 하고, 버튼의 배경 색상을 다양하게 적용해볼 수 있는데, 중요한 건 그 버튼에 무슨 글자가 쓰여있는가다.
어떻게든 사람들이 버튼을 클릭하게 만드는 게 목표라면 버튼 주변에 약간 성가시게 움직이는 화살표 커서 이미지를 gif로 달아놓을 수도 있다. 아니면 스크린을 위 아래로 길쭉하게 채운 긴 버튼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사실 버튼이 아니라 배너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실수로, 누를 생각이 없는데도 클릭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다. 이 책에서도 "지표를 올리기 위해 무리하게 사용자를 낚거나 기만하는 문구를 쓴다면" 어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UX라이터로 일하는 저자가 가장 문제적으로 보는 글쓰기는 "사용자의 이익과 관련된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버튼의 톤을 조정해서 뭔가를 얻어보려는 시도"다. 우리가 인터넷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버튼을 마주했을 때, 후자를 누르고 싶어도 반드시 전자를 클릭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을 받게 되는 상황을 저자는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ex)
[편하게 앱으로 보기] vs [불편하지만 웹으로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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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읽습니다》가 어떻게 해야 누르고 싶은 버튼을 만들 수 있는가(후킹한 버튼 제작법 더보기)를 가르쳐주는 건 아니다. 대신, 이 책은 꽤나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한국말의 해요체가 가지고 있는 친근한 이미지라는 허상을 짚는다.
"그런데 한국어의 해요체와 하십시오체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원하는 보이스나 톤을 구축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 이유는 이들 문체에 (...) 두 가지 성격이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요체는 두루높임+비격식성, 하십시오체는 아주높임+격식성을 띠고 있다. (...) 아주 쉽게 말하면 한국어에서는 상대를 적당히 높이면서 공식적으로 말하기가 어렵고, 상대를 아주 높이면서도 사적인 느낌을 주며 말하기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증권이나 보험 앱과 같은 금융 서비스를 예로 들어보자. 서비스 전반을 해요체 범벅으로 만들면 사적으로 아는 사이처럼 격의 없는 느낌을 줄 수 있겠지만, 사용자를 지나치게 만만하게 본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금융기관의 공식적인 느낌이 덜해지고 전문성이 결여된 듯 보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 전주경 《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읽습니다》, p.135
실리카겔은 'NO PAIN'에서 "노래를 해요" 대신 "노래를 합시다"를 선택함으로써 최소한의 정중함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내가 만든 집에 너를 초대하는 것이지만, 그 초대가 너에게 무조건 고맙게 느껴지지 않을 수는 있으니, 호의가 권리가 되지 않도록 노래 속 화자는 말을 걸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점을 신경 쓴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지는 거다. (문득 실리카겔이 보험 앱이나 금융 서비스의 공식 테마송을 의뢰 받아 제작하는 상상을 했다. 장르와 스타일을 떠난 종결 어미가 어떤 식일지 궁금하다.) 여러 경우의 수를 가진 문체들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으며, 당연히 여기에 정답은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발화 시에 거의 100퍼센트 해요체와 하십시오체를 섞어서 쓰는데, 이는 두 가지 문체를 섞어서 쓰는 것이 가장 기계적이지 않고, 동일 문체의 중복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그야말로 '가장 한국인다운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성인 대부분은 한국어 네이티브로서 언어적 직관에 따라 적절한 수준의 격식성, 정중성을 표현하면서도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두 문체를 섞어서 말할 수 있다."
- 같은책,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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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net
한편, 최근의 나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 시즌 2를 보며 여성 댄서 이바다를 '바다언니'라고 꿋꿋이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유머로, 자신이 94년생 이후 출생자도 아니면서 샤이니 태민더러 '태민오빠'라고 부르는 일과 맥을 같이 한다. 나보다 어리지만 그는 오빠됨을 수행 하므로, '셀럽의 존함+오빠'는 일종의 고유명사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바다언니'를 부를 때 나에게 누구도 "how old are you?"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좀 더 복잡한 건 케이팝 씬에 흐르는 '선배님' 호명 문화라고 본다. 그들은 나와 상대 사이에 선배와 후배로서 간접적인 교류조차 없었더라도, 그런 관계 맺음의 절차가 생략되더라도 '선배님'이라는 말을 놓지 못한다. 이름에 '님'이나 '씨'만 붙여서 부르는 게 그 사람(심지어 이미 작고한 사람)이 이룬 대단한 업적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여겨질 여지가 있기 때문인 걸까? 'G선상의 아리아'의 주요 멜로디 한 소절을 샘플링해서 'Feel my rhythm'을 발표한 레드벨벳은 컴백 기념으로 출연한 라디오에서 "바흐 선배님과 콜라보 해서 영광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웃자고 한 소리에 나도 크게 웃었지만, 과연 한국어에서 격식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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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언니, 오빠, 선배(님)이라는 호칭은 때때로 꼭 필요하다. 그러나, 철학자이자 번역가인 이성민의 책 《말 놓을 용기》를 보다가 "한두 살 나이차로도 형, 아우를 따져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 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시 친구나 동료다"(p.57)라는 말에 나는 깊이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간 자신이 실행해 왔던 평어 실험을 들려주고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와 대화의 장에 더 많은 평어가 도입되기를 제안한다. 그는 말한다. 평어란 “반말과 닮기는 했어도 평어는 기존에 없던 한국말”(p.99)이며, "반말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반말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한국말에는 이제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 또한 평어가 있다고."(p.11)
《말 놓을 용기》의 저자는 한국어가 '한쪽을 높이는 동시에 한쪽을 낮추는 차별적 어법'이라는 선진 언어학 연구자의 접근방식을 가져와, 그런 말이 가진 한계가 얼마나 관계와 소통을 경직되게 만드는지 짚고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사례 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야자타임을 시행하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차이다.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야자타임을 만들어도 끝났을 때를 생각하며 말하기를 조심하고 주저한다'는 면이 있다고 한다. 수많은 한국인이 후환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입조심을 하는 걸지도.
이 책은 더 늦기 전에 평어를 써야 한다고, 당신이 누구든 지금 당장 사람들을 모아서 평어 말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현혹하는 대신, 평어 생활을 더디더라도 은근하게 권유하는 쪽이다. 그렇게" 서로를 높이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동등한 인간으로서 함께하는 모험"을 제안한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싶지만, 나는 다시금 실리카겔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로 시작되는 그 노래가 나에게 주는 이상한 용기를. 그리고 예의, 공손, 정중함 같은 미덕들이 만들어 낸 우리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좁히고 싶다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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