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ㅇ 지난 11월초에 열렸던 UE15(언리미티드에디션15)에서 TINN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업물을 공개 했던 구구님을 모셨습니다. 오늘은 팀을 결성하게 된 올 해 4월부터 행사일까지 약 반년을 타임라인 순으로 돌아보려고 하는데요.
- 4월, 평화로운 어느 날 - 5월 말, 이틀만에 기적의 지원서를 쓰다 - 6월 말, 합격 목걸이를 걸다 - 9월 초, 작업자 듀오 갈등을 빚다 - 9월 말, 디자인 언어 없이 디자인을 하다 - 10월 말, 부스를 하염없이 꾸미다 - 11월 3일, 행사가 시작되다 - 11월 5일, 분실물이 발생하다 - 2024년, 언리밋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TIP
*풀버전은 오디오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중략) 9월 초는 저희가 짧은 갈등을 빚고 나서 일이 추진되고 있다고 느꼈던 시점입니다. (스타트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인) 슬랙을 이용해서 매일매일 원고 진행 상황을 공유하자고 제가 제안을 했죠. 그리고 그 메신저에는 ‘진행 상황 공유'라는 제목의 게시판이 있었어요. 진행되고 있는 걸 바로바로 거기서 다 얘기하자고 했고요. 그리고 9월 초에 세 권의 북 디자인을 의뢰를 드렸는데요. 우리가 언젠가 작업 해보고 싶었던 디자이너분을 각자 생각해 와서 세 분께 메일을 보냈으나 ALL 거절이었죠.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었다.
구구 맞아요. 일정이 너무 촉박했어요.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혹시나 이때 되실 수도 있잖아'라는 마음으로 제안 메일을 보냈던 것 같고요. 우리가 예산은 어느 정도 맞춰드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저질렀는데 아무튼 다 거절당했죠.
ㅎㅇ 11월에 책이 나와야 하는데 9월 초에 디자인 제작 의뢰를 하는 건 늦은 것이다. 알게 됐죠.
구구 매우 매우 늦은.
ㅎㅇ 두 번째 거절을 당했을 때부터 ‘이거 표지 디자인 우리가 할 수도 있겠는데…?’ 라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는데요. 진짜로 세 분 다 다른 일정이 이미 잡혀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을 주셔서 너무 아쉽지만… 우리가 디자인을 하게 됐어요. 원고를 9월 마지막 주까지 쓰고, 10월 초까지 퇴고를 마쳤고요. 그 사이에 추석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추석에 인디자인을 독학하게 된 나. 저에게 2023 추석이란 인디자인입니다….
구구 내지 디자인은 해인 님이 다 하셨고.
ㅎㅇ 표지 디자인은 구구님이 다 했어요. 근데 표지 디자인을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심경이 궁금한데요.
구구 우선 우리가 슬랙에 디자인 레퍼런스를 공유했어요. 암담했죠. 왜냐하면 그 레퍼런스들은 너무 훌륭한 작업물들이고, 우리는 그 발톱의 때만큼도 따라갈 수 없는데 그래도 참고차 꾸준히 그런 것들을 남겼고요. 사실 우리가 디자인을 어떤 방향으로 할지 확정하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만 이것이 디자이너와의 아주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작업이고, 그러니까 제가 어떤 피드백을 남기면 디자이너가 그걸 수용과 반영을 해줘야 하는 것일 텐데 문제는 우리에게 둘 다 디자인의 언어가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피드백을 줄 때, 마치 디자이너들이 맨날 SNS에 욕하는 클라이언트들이 하듯이 “느낌이 이게 아니다" “이게 좀 더 뭔가 약간" 이런 식으로 추상적인 표현을 하는 일이 많았어요. 물론 우리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의견을 나눴어도 사실 작업물에 반영 못했을 것 같긴 한데요. (웃음)
ㅎㅇ 그걸 구현할 역량이 안 되니까. (웃음)
구구 근데 우리 사이에서 추상적인 언어들이 오갈 때 ‘이거 진짜 큰일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고요. 그래서 현업에서 디자인하는 몇몇 동료들에게 좀 의견을 구하기도 했어요. 《작업자의 사전》 표지는 사사분면 콘셉트가 정해진 후에는 사실 공수가 거의 안 들었고요. <지엽> 시리즈는 제가 직접 드로잉을 했는데 사실 의미가 있어요.
ㅎㅇ 디자인 의도, 알려주세요.
구구 《목차: 우려먹기》 표지 드로잉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았는데요. 일단 티백처럼 보였으면 좋겠는데 너무 티백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ㅎㅇ 뜨거운 물에 우렸으면 좋겠는데 완전히 우러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구구 두 번째로는 제가 해인 님 원고를 읽으면서 자아가 굳건한 사람의 글은 이렇게 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가로지르는 선을, 단단한 길처럼 보이도록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각주: 밀려난 자리》는 책 속에 '무덤'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래서 표지 드로잉을 돌무덤처럼 표현을 해보자. 근데 역시 무덤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좀 애매하게 그렸죠.
ㅎㅇ 올해 <오펜하이머> 개봉했잖아요. 저는 《각주: 밀려난 자리》 표지 시안 봤을 때 그 영화에 나온 버섯구름 같기도 해서…. (웃음) 근데 무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정말 무덤처럼 보이는 거죠. 아무튼 직접 드로잉을 하신 거예요. 전 깜짝 놀랐죠. 도저히 어떤 표지 디자인이 나와야 하는지 제 안에 솔직히 생각이 없었거든요. 전 함량 미달의 동료였습니다. 근데 정말 난 디자이너가 아니니까… 모르겠어…. 그리고 (의뢰 일정 자체에 착오가 있었음에도) 원고만 다 쓰면 정말 좋아하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분과 이번 작업을 할 거라고 오해해 왔기 때문에 거기서 표지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라는 걸 내기가 촉박하게 느껴졌는데요. 어쨌든 구구님이 진짜 하드 캐리 해주셨다.
구구 그래도 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우리가 취향이 좀 비슷하면서도 확고하다는 거였어요. 덕분에 의견을 더 내면서 맞춰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표지 디자인도 사실 최종 버전이 아니었잖아요. 고민하다가 샘플북을 제작해 보고 방향을 좀 틀어서 결정한 건데 그때도 서로를 설득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ㅎㅇ 맞아요. 우리 공통의 취향 중에 말 그대로 책을 구성하는 디자인에 대한 취향도 있지만, 책의 물성과 종이의 질감에 대한 취향도 각자 꽤 비슷한 편이었어요. 초반 회의 단계에서는 종이가 팔랑팔랑거렸으면 좋겠다, OO 나무 같은 질감이 났으면 좋겠다, 색지는 여기에 넣었으면 좋겠다, 제본 대신 고리를 끼우자…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래서 그만큼 멋진 물성을 가진 책을 꿈꾸기도 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심플하고 단단한 책들이 나왔다고 결론을 내봅니다. 종이에 대한 것도 사실 지식이 많지 않으나 최대한 시도할 수 있는 건 해봤다. 근데 이 말은 그만큼 도서 제작 업체들이 꽤 잘 되어 있다는 거죠. 종이에 대한 선택지가 독립 출판하는 사람으로서는 적지 않게 느껴졌어요.
구구 많아서 오히려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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