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의 OO, 발행인의 연간 업무, 뉴스레터 돌아보기
케이팝 부문의 제목왕은 단연 세븐틴의 '손오공'이다. 손오공이라니. 손자병법 오늘 공부해야되는데 처럼 억지 추측이 필요한 줄임말이 아니다.* 이 노래는 근두운을 풀업하면서 포기를 모르고 날뛰던 이들이 "마치 된 것 같아 손오공"이라고 자기 고백하는 현장이다. MV에는 13명의 멤버들과 238명의 댄서들이 동원 되었으므로, MV나 코레오그래피 비디오 또는 음악방송사가 제공하는 풀캠에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쾌감이 있다.
* 케이팝에는 줄임말이 많다. 샤이니 ‘아미고'(2008)은 “‘아’름다운 ‘미'녀를 만나면 ‘고’생한다”의 줄임말이다. 뉴진스의 ‘ETA’가 발매됐을 때, 모두들 ETA가 ‘E’stimated ‘T’ime of ‘A’rrival(도착예정시간)의 줄임말이라는 걸 검색을 통해 알게 됐을 거다.
238명의 댄서를 모았다니. 메가크루 퍼포먼스는 Mnet 댄스 경연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2>의 주요 미션이기도 했다. 메가크루는 보는 이의 도파민을 폭발시킨다. 두 사람만 모여도 크루라고 부를 수 있지만, 거기에 '메가'를 더하는 순간 잘 편집된 단체생활의 이면에 대해 상상해보게 되어 더욱 그렇다. 참가팀 '원밀리언(1MILLION)'은 1984년생 고연차 댄서 리아킴과 2003년생 루키 댄서 하리무가 한 팀을 이루어 각자의 역할을 해내는 걸 보는 맛이 있었다. 이들의 무대는 메가 크루 미션 대중 평가 중 영상 조횟수 1등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림 킴의 두 곡 'Yo-Soul'과 'Yellow' 선곡부터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안무 속에서 흑과 백으로 이분할 된 태극기가 그려질 때 "난 정말, 이 나라가 좋아요" 하고 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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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도전은 두 편의 연애 예능을 보았다는 것이다. 2022년까지는 뚜렷한 이유 없이 연애 예능에 흥미를 붙이지 않았던 것도 인정한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연애 예능은 웨이브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이 되었다. 천계영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일정거리 안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가오면 스마트폰 앱 알람이 울린다는 설정을 활용했다. 프로그램 셋팅에 순순히 놀아나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판을 짜는 사람과, 한 번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음으로써 ‘순애보’라는 낡은 별칭이 붙어버리는 사람을 포함해 그야말로 온갖 인간군상을 보는 재미가 엄청났다. ENA <나는 SOLO> 16기도 보았다. 이 또한, 온갖 인간군상을 보는 재미를 주었다. <나는 SOLO> 16기를 보지 않고서는 대화에 낄 수 없겠다는 자각이 있었고, 공통의 문화적 코드가 실시간으로 피고 지는 과정을 보기도 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에 대한 인상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너무 많이 알게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짙은 피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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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유튜브는 <요정식탁>이다. 토크쇼 포맷의 유튜브가 폭발적으로 성장세를 보였다.* 과도한 음주를 조장하는 술 방송에 대한 경각심 부족이나 가전 및 식품 업계의 줄지은 PPL에 대한 피로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올해는 그 프로그램에 얼마나 희소성 있는 게스트를 섭외하는가 만큼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론칭한 사람이 인터뷰어로서 가지고 있는 자질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시간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요정식탁> 속의 정재형은 잘 듣고 잘 반응하는 사람이다. 피아니스트이자 가수,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으며, 요리를 좋아하는 그는 토크쇼 호스트로서 준비된 인재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 광고를 잘 한다. 나는 정재형이 협찬받은 밥솥을 두 개나 샀다(소장용 1, 선물용 1이다.) <요정식탁>은 tvN 스토리/Olive 요리 프로그램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2014)을 전신 삼아, 동시대의 매체에 개인의 캐릭터를 가장 잘 녹여낸 사례로 보인다.
* 첫 에피소드 공개일 기준으로 2023년에 시작된 토크쇼 포맷의 유튜브 채널에는 <나영석의 나불나불>(<채널십오야>), <짠한형 신동엽>, <이소라의 슈퍼마켙>(<슈퍼마켙 소라>), <장도연의 살롱드립>(<TEO>), <조현아의 목요일 밤>, <뱀집> 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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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의 장르는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 산문’이다. 어떻게 보아도 생경하지 않은지? 이 책에는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롱리스트(1차 후보)에서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이, 최종 후보에서 정보라 《저주 토끼》가 연달아 지명되면서 이름이 알려진 번역가 안톤 허를 포함해 다양한 한국 문학 번역가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인터뷰 하나하나도 재미있지만, 다수의 인터뷰집을 펴낸 인터뷰어로서의 은유 작가의 글을 읽는 맛이 탁월했다.
나는 세상의 인터뷰어들이 어떻게 원고를 쓰는가가 궁금했기 때문에, 활동가를 초대해 비건 만찬을 차려내는 콘셉트를 가진 안담, 한유리, 곽예인 《엄살원》, 여성노동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요리를 내어주고 일 이야기를 나누는 에리카팕 《언니, 밥 먹고 가》,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만난 김고은 《함께 살 수 있을까》, <씨네21> 임수연 기자의 《창작형 인간의 하루》, 배우 김신록의 《배우와 배우가》 등을 읽었다. 모두 인터뷰집이다. 지금, 단행본으로 엮여나오는 인터뷰집은 기획이 뾰족한 대표적인 분야 중 하나인 듯 하다. 모두 허투루 읽을 수 없는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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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케이팝은 꼽기 어렵지만, 케이팝 월드 내에서 올해의 듀오를 꼽자면 'AKMU(이찬혁X이수현)'이 될 것이다. 이들은 혈연이자 비지니스 동료로서 독특한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음악 토크 프로그램 KBS2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에서 이수현은 게스트들과 레전드 듀엣 무대들을 여럿 탄생시켰다. 이찬혁 또한, ‘이찬혁비디오’라는 이름으로 먼저 프로젝트 그룹 앨범 [우산]을 발표한 이후 뮤지션 이수현에게 톤앤매너를 맞추었다는 AKMU의 싱글 앨범 [Love Lee]를 공개했는데, 고르게 음악이 좋다. 킬링보이스 'AKMU' 편 또한 반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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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공연은 코첼라 페스티벌에서의 '로살리아(Rosalia)', 단독콘서트 <PERFECT ILLUMINATION>에서의 '샤이니', DMZ 피스트레인 페스티벌에서의 '실리카겔'이다. 군백기를 끝낸, 데뷔 15주년을 맞이한, 세명이서 5인분을 해내는 샤이니의 콘서트는 보기 전부터 이미 올해의 공연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팀 샤이니는 늘 높아진 기대를 새롭게 충족시킨다.
로살리아와 실리카겔은 원래 음악을 잘 몰랐는데도 공연을 보면서 단번에 매료된 경우다. 코첼라 메인 스테이지에서 블랙핑크 무대를 기다리며, 정말 대기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리를 지키다 보게 된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로살리아 무대 때에는 사막에서 해가 완벽하게 적절한 속도로 지고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터무니 없는 사유로 입덕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실리카겔은 정규 2집 [POWER ANDRE 99]를 발매하기 전에 앨범 수록곡 전곡(무려 18곡)을 순서대로 들려주는 셋리스트로 구성된 동명의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 콘서트도 좋았지만 그들의 무대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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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물은 '두아 리파(Dua Lipa)'다. 2017년에 데뷔한 영국 출신의 팝스타는 두아 리파는 2022년에 뉴스레터 <Service95>를 창간하면서 시선을 사로 잡았다. 그는 “모든 발행물은 두아 리파가 세상 어디에서 무엇을 스트리밍하고 있으며, 어디를 갔으며,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에 소비하는지에 관하여 직접 쓴 편지로 마무리될 것이다”라며 꾸준히 레터를 보냈다. 그러더니 올해 <Service95 Book club>을 론칭했다. 단순히 추천 도서를 선정하고 마는 게 아니라, 도서 저자의 플레이리스트, 저자가 추천하는 더 읽어볼 자료, 저자 인터뷰, 독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도서 토론 가이드 등을 공개하는 식으로 큐레이터 역할을 해내는 식이다.
게다가 그는 팟캐스터이기도 하다. 팟캐스트 <In Dua Lipa: At Your Service>에서는 동료 뮤지션인 트로이 시반, 빌리 아일리시, 블랙핑크 제니, 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그레타 거윅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심지어 최근에는 애플 CEO 팀 쿡을 게스트로 초대했다. 나는 비-한국어 팟캐스트를 거의 듣지 않는 편인데, 두아 리파의 중저음 영국식 발음을 사랑한다. 여러가지를 하는데 다 할 거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 올해의 인물이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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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드라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과 NTV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다.* 전자는 미국 사회에서 생존하고자 애쓰는 동양인들이, 후자는 전생의 기억을 가진채로 끝없이 환생하며 다음에는 원하는 모습으로 환생하려 애쓰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두 작품의 온도는 아주 다르지만, 이 두 작품이 좋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인간들이 겪는 만사의 혼란스러움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거라 보여주는 '비인간'이 등장한다는 거다. <브러쉬 업 라이프>의 비둘기와 <성난 사람들>의 까마귀가 그렇다. 이는 마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의 돌맹이와도 같다. 이야기 속에서 계속 발산하며 나아가는 인간을 '뮤트'해버리는 방식이 그 입을 다물게 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인간이 아닌 건 무엇이든 보여준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성난 사람들>에서는 '대니 조'(스티븐 연) 캐릭터가 좋았는데, 매거진에 관련하여 기고한 글을 일부 인용한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사람과 우연히 스친 낯선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 타인에 대한 나의 배려를 적절한 보상으로 돌려받지 못할 때, 우리의 속은 분노를 동력 삼아 타오른다. 성난 인간들의 분노를 대체 에너지로 변환하는 법이 개발된다면 적어도 인류의 미래 먹거리 걱정은 사라질 텐데. 총 10부작인 <성난 사람들>에서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소시민 대니는 1화부터 10화까지 꼼꼼하게 화를 내고, 동시에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그와 뜨겁게 끓어오르는 시간을 함께 통과해야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빅이슈 코리아> 313호 '올해의 캐릭터' 중에서
올해의 팟캐스트는 하나만 꼽기 어려워서, 올해 듣기 시작한 팟캐스트 세 개를 소개한다. 정민재 평론가와 정연경 음악콘텐츠기획자가 진행하는 <뮤직 매거진 뮤브>, 20대 여자 셋이서 대중문화를 리뷰하는 <비주류백화점>, 여성학자 정희진이 편집장 역할을 하는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케이팝을 듣지 않을 때는 거의 팟캐스트를 듣는 생활은 올해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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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영화는 <플랜 75>다. 지난호에서 이 영화를 소개했으니, 그대로 전문을 가져와본다. "이 영화는 초고령화 사회의 대안으로서 75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안락사가 합법화 된 일본의 모습을 그린다. 다정한 할머니로, 표정이 못 생기지 않은 할아버지로 늙고 싶다는 소망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서 나를 본다. 총 세 명의 젊은이가 나온다. '플랜 75'의 문지기와도 같은 공무원, 죽음의 D-day가 다가오는 이의 정서적 케어를 해주는 콜센터 직원, 사후의 절차를 처리하는 간병인. 각자 할 일을 잘 해낼수록 세상은 쾌적해질까? 그들은 자신의 노후를 적극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을까?"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이 영화를 2023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에서 보았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제작했고 다섯 명의 일본 신예 영화 감독이 미래의 일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상상한 다섯 편의 연작 영화 <10년>(2018)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첫 편에 실린 단편영화가 '플랜75'인데요. 하야카와 치에 감독이 러닝타임 18분의 단편을 1시간 45분의 장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배우 캐스팅을 새로이 하고, 스토리라인을 전면 다듬었다고 합니다. 단편을 먼저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장편 영화 <플랜 75>는 저의 올 해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정식 개봉하면 다시 보고 싶어요.”
- <콘텐츠 로그> 153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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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올해의 굿바이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왔든간에 부재 이후에 잔잔히 그 존재감을 헤아려보게 되는, 기억하고 싶은 창작자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먼저 NBC 시트콤 <프렌즈>(1994-2004)의 영원한 챈들러 빙, 배우 '매튜 패리'의 명복을 빈다.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프렌즈>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헤클스 씨의 유품' 편에서 고인이 된 이웃을 향해 프렌즈의 친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는 챈들러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튜 패리의 자서전 《Friends, Lovers and the big terrible thing》(2022)에는 마약 중독과 치열하게 싸운 그의 삶과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프렌즈> 이후로도, 상실을 겪은 라디오 진행자가 일에 복귀하기 위해 심리 치료 모임에 참석하면서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유쾌하게 극복하려는 노력을 그린 NBC 시트콤 <고 온>(2012) 같은 작품에 주연으로 참여했던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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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문빈'의 명복을 빈다. 문빈이 속한 아스트로 유닛 ‘문빈&산하'가 연초에 발매한 미니 3집 [INCENSE]를 들어보면 그의 빛나는 재능을 더 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데이식스 성진은 12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콘서트에서 불안 증세로 활동 중단을 해야 했던 지난 날들을 팬들 앞에서 돌아보았고, 아이브 레이, 있지 리아 등은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소견에 따라 활동을 중단했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견뎌내며 활동을 강행하는 대신 그들이 꼭 필요한 쉼을 가지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친구나 부모가 있어도 연예계의 생리를 잘 모른다면 말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상담이 그들에겐 소중해요. (...) 일주일 내내 상담 시간만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어요." 연습생과 아이돌 대상 심리상담을 하고 있는 조한로 상담심리전문가의 인터뷰를 읽으며 더욱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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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 <듣똑라>가 서비스 중단 소식을 알렸다. 듣똑라는 맥락있는 뉴스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시도하고, 혁신을 이루어나가는 밀레니얼 세대의 대표 미디어였다. 팟캐스트로 시작해, 2020년에는 팟캐스트와 유튜브 두 채널을 병행했고, 2022년에는 앱이 출시 됐다. 개인적으로, 올해 <듣똑라 레터> 인터뷰 차 듣똑라 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탓에 이 소식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그들과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나는 떠났다가 돌아오는 힘, 멈추었다가 지속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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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굿바이도 있다. 지난 11월 24일, '김혜수'가 청룡영화상 사회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3년부터 2023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의 마지막 출퇴근의 기록은 유튜브 <by PDC 피디씨>에 퇴근길 시리즈에 담겼다. 김혜수는 은퇴 기념 트로피를 수상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일이건 관계이건 떠나보낼때는 미련을 두지 않는데요. 다시 돌아가도 그 순간만큼 열정을 다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난 시간들에 대해서 후회없이 충실했다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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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패턴인데, 2023년에는 공저자로 참여한 책이 계절마다 나왔다. 봄, 여름, 가을에 각각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편않), 《여행의 장면》(유유히), 《작업자의 사전》(TINN)이 출간 되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지만 늘 내가 상대에게 수월한 협업자이기만을 바랐다. 세 권의 책으로 네 번의 북토크와 한 번의 워크숍을 하는동안 역시 대면해서 사람들을 만나길 잘 했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소소한 모객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올해도 약간의 음악 일을 했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바이브에서 정기적으로 6개의 플레이리스트를 선곡했고, 계절이 제목에 포함된 시즌성 플레이리스트(예: 청량함 가득한 남돌 썸머송)를 계절마다 2-3개씩 추가 선곡했다. 작년 여름부터 공동진행 했던 지니뮤직 오디오 프로그램 <케이팝 탐사대>가 종영했다. 대중음악평론계에서 ‘김가네’를 맡고 있으신 김윤하/김영대 님의 이웃 코너 '시시콜콜 음감회'를 시청자로서 워낙 재미있게 챙겨 들었고, 그래서 내 코너가 오면 '전문성은 이웃코너에서 다 하니까!' 라는 생각 덕에 맘껏 좋아하는 케이팝에 대한 주접을 떨었다. '환갑잔치 플리 미리 풉니다' 편이나 '페스티벌, 이 케이팝 못참지' 편은 오디오인데도 모니터링 해보면 김윤하 평론가님과 나의 안광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 두 편에서 나누었던 음악 이야기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얼마 전 100호를 맞이한 YES24 월간지 <채널예스>에 객원 에디터로 참여했다. ‘빅데이터', '문해력', '플레이리스트', '여름휴가', '영상화 된 소설'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기획기사들을 만들었다. (섭외 도움과 감수 등 직간접적으로 기사에 도움 주신 콘텐츠 업계의 한분한분께 감사드린다.) 기사가 될 원고에 대한 제 3자의 눈이 필요한 상황에는 프리랜서 매거진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60대 아빠를 잠시 고용해보기도 했다. 동종 업계인인 가족에게 업무 피드백을 받으려니 눈물에서 겨자 맛이 났다….
2023년에는 인터뷰 업무의 비중이 파격적으로 늘었다. 우란문화재단과 작업한 예술문화업계인들을 만나는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김경찬 도예가, 권지휘 극공연 전문 음향디자이너, 백은혜 배우, 윤현학 그래픽 디자이너, 권세미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스트, 김민영 티켓 매니저를 만났다. '세상에 직업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주기적으로 깨달으며 모름에 대해 아는 척 하지 않고 말해야만 할 때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 흙으로 빚어진 정말 비싼 술 잔을 거의 살 뻔했고, 버츄얼휴먼이 등장하는 비인간에 관한 연극 제작자의 인터뷰가 공개된 이후에도 나는 멸종위기에 처한 벌 공부를 틈틈히 하고 있다.
스티비를 이용해 뉴스레터를 보내는 크리에이터와 실무자를 만나는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공유주거 브랜드 맹그로브, 케이팝 플랫폼 케이타운포유, 경험 큐레이션 커뮤니티 주말랭이, 뉴미디어 듣똑라, 엄주 그림 작가를 만났다. 뉴스레터를 보내는 사람이다보니 이 인터뷰 시리즈에는 애착이 클 수 밖에 없다.
채널예스에서는 안전가옥 윤성훈 스토리 PD, 전병근 번역가, <요즘사> 이혜민 콘텐츠 디렉터, 정은주 번역가, 워크룸프레스 편집팀, 이지나 작가를 인터뷰했다. 처음 보는 인터뷰이가 꽃다발을 건네준 날, 또는 인터뷰를 마치고서 인터뷰이가 즉석 타로를 봐주었던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뉴욕에 있어서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 했는데, 해외 인터뷰이와 일을 진행하는 프로세스가 늘 궁금했었고 마침내 그 점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4분기부터는 <콘텐츠 로그>에서도 자체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리는 나란히 자란다》의 김달님 작가와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의 장참미 작가 인터뷰가 나갔다. 짧게는 한시간, 길게는 세시간까지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사람들과의 대화 시 균질한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좋은 인터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한 해동안 인터뷰집을 초조한 마음을 안고 찾아 읽었다.)
2021년부터 자체 제작하고 있는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서는 하반기부터 '소설만 읽겠다’는 기조를 버렸다. 올해 팟캐스트에서 다룬 도서는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절연》,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연기 수업》,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개인적인 체험》, 《파과》, 《파쇄》,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 《갈대 속의 영원》, 《실리콘 밸리의 목소리》, 《인생샷 뒤의 여자들》, 《단순한 열망>,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동아시아 영화 도시를 걷는 여성들》, 《상황과 이야기》다.
<두둠칫 스테이션>은 함께 진행하는 에디터리님과 내가 각자 힘에 부칠 때 빠르게 속도 조절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숨구멍이다. 앞으로도 이런 리듬으로 가 볼 예정이다. (지난 번에 밥을 먹다가 에디터리님이 공개방송 이야기를 했다. 약간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셔보는 컨퍼런스 스타일의 방송이었는데… 언젠가는 할 수 있겠죠……?) 덧붙여, 가을에는 <두둠칫 스테이션>이 첫 광고를 수주했다. SF 소설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의 이경 작가를 스튜디오로 모셨다. 소설가와의 인터뷰는 처음이었는데, 첫 책 이야기를 저자로부터 이렇게 길게 들을 수 있는 건 드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 팟캐스트 <아키의 책바구니>에서 2월의 어느 날 책바구니에 담긴 책들을 털었고, 필로우 출판사와 들불이 공동 기획한 워크숍 '관찰의 방법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을 경유하여'의 이끔이로 참여했다. 다른 채널에서도 글을 썼다. 패션 플랫폼 레이지나잇에서 밤에 여유 있게 볼만한 콘텐츠를 소개하는 주간 연재를, 3분기에는 투비컨티뉴드에서 《목차: 우려먹기》(TINN)를 선연재했다. 11월에는 아트북페어 #UE15에서 책을 팔았는데, 팟캐스트에 구구 님을 모시고 이야기 나눈 '작업자 듀오, 북서울에 가다: #UE15 회고 편'은 다른 에피소드 대비 조횟수가 눈에 띄게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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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로그>는 2023년에도 출판업계의 사랑을 받았다. 총 7개 출판사와의 협업을 진행했다. 도서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팟캐스트를 듣다가》, 《악인의 서사》, 《페이지보이》와 교보문고의 <책과 함께한 순간들> 캠페인을 광고 콘텐츠로서 소개 했으며,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 출간을 기념해 반비 출판사의 뉴스레터 <책타래>와 콜라보레이션 레터를 제작했다.
한편, 나는 올해들어 뉴스레터 고인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아주 좋게 말하자면 지속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9년부터 여전히 뉴스레터를 더 잘 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기획회의>에 '대중이 없는 시대의 대중문화 뉴스레터'를 기고했고, 작업책방 씀에서 '구독자 중심으로 기획하기' 워크숍을 진행 하면서 중간점검을 했다.
8월부터는 뉴스레터의 발행주기를 주 3회에서 주 8회로 개편했다. 구독자 대상 설문조사가 큰 계기가 됐다. 설문조사 리포트를 쓰면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았다. 연간 총 31편의 콘텐츠 로그를 보냈고, 8월부터는 콘텐츠 로그에 담기는 콘텐츠 단위가 10일에서 일주일로 조정 되었다. '지난주에 가장 좋았던 곡들'이라는 주간 음악 추천 코너도 만들었다. 늘 여기서 시작했는데 저기서 끝이 나다니? 하는 셀프-당혹스러움으로 보내고 있는 콘텐츠 리뷰 레터 '못다 한 이야기', 게스트 에디터를 모시는 콘텐츠 리뷰 코너, <두둠칫 스테이션>의 텍스트 버전 '믹스테이프 (논)픽션' 등등 연간 총 19편의 서브레터도 발행했다. 오늘자 레터까지 포함하자면, 올해 레터를 51번 보낸 것이다.
2024년의 가장 큰 변화는 <콘텐츠 로그>의 공식 홈페이지 오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홈페이지 오픈 기념 수건'을 주문 제작했다. (#UE15에서 굿즈를 만들어봤더니 봇물이 터졌다...)
늘 어떤 분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 뉴스레터를 봐주시는가를 떠올린다. 설문조사를 통해 새삼 알게 된 건, 많은 이들이 자신이 속한 업계의 전망을 적극적으로 비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안 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건 기만이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앞이 안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달부터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출판계와 영화계에 대해 비관하는 말 얹기 한 달만 안 해보기'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망했다고 말하는 일은 너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대화의 흐름에 따른 것인지라, 작품 주변에 흐르는 암담한 상황을 걷어내고서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대단히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망했다는 이야기를 줄이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은 당연히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지만, 나는 계속 사람을 만나고 일(=봐야해서 보는 것)과 일이 아닌 무엇(=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뒤섞인 대화를 해야 한다. 종이 값이 오른 탓에 단행본 제작단가와 책 값이 오르고, 극장 관객이 코로나 이전 대비 30% 수준으로 집계 되었다는 지표 앞에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쓸쓸해 했다. 그래도 우리는 또 한 해를 무사히 건너왔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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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는 대중문화를 큐레이션 하고
목요일에는 못다 한 이야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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