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가 근본적으로 환기되고 싶다"
가끔 이 세상은 가뿐하게 자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한 보 뒤처진 듯한 기분을 안겨줄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패시브 인컴으로 파이프라인을 뚫었다"는 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패시브 인컴과 파이프라인. 영어단어이지만, 조음 위치상 파열음 'ㅍ'으로 시작되는 거친 두 가지가 맞붙었을 때 전해지는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누군가가 자는 동안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여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 물건이 잘 팔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물론, 돈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첨단기술이 우리의 수면 시간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다면, '자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일을 해낼 수 있음' 보다는 '자는 동안 나도 모르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음' 쪽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는, 적게 벌고 많이 벌고의 문제와는 다소 무관하며 당신이 자는 시간에 벌어지는 다른 일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미예 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속 백화점 직원들은, 누군가가 자는 동안 자신의 일을 한다. 이들을 마치 눈이 내리는 마을에서 주민들이 깨어나기 직전의 새벽마다 제설작업을 해두는 환경미화원들에 빗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양계를 돈다는 진리를 철저히 준수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세상의 어떤 지점에는 아침이 밝아오는데 또 다른 지점은 이제 막 밤을 맞이한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예외 없이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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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토리나인
"몰디브에서 3박 4일 보내는 꿈’은 들어오자마자 다 팔렸어요"라는 어느 직원의 말처럼, 백화점이 취급하는 어떤 꿈들은 유난히 인기가 뜨겁다. '주 4일제'가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일하기의 빈도라면, 이 꿈은 오히려 적은 판매량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는 제약이 많으며 대표적인 휴양지로 떠나볼 수 있는 하룻밤의 꿈은 불티나게 팔린다. 심지어 그 꿈을 꾸는 데에는 물리적으로 나흘의 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같은 경우는 실감 나는 몰디브행 꿈을 꾸고 일어나는 쪽보다 실제로 몰디브에 다녀오는 게 훨씬 더 좋다. 나는 앉은 자리(또는 누운 자리)에서 나의 칙칙한 기분을 환기해줄 것이라 말하는 세상의 모든 장치를 거의 믿지 않는 사람이어서, 우연히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입장하더라도 충동구매조차 하지 않을 것임을 자부한다. 당장 떠날 수 없는 게 주어진 현실이래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가 근본적으로 환기되고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팔리지 않은 꿈들의 종착지는 백화점의 가장 꼭대기 층인 5층이다. 거기에는 꿈의 재고들이 파격적인 할인가로 켜켜이 쌓인다. 5층 판매원에게는 꿈이라는 게 손님에게 선사하기 마련인 반짝거리는 환상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떠드는 걸 넘어서, 더 고도화된 영업 능력이 필요해 보인다. 나같은 손님은 오히려 거기까지 올라가서야 5층 담당 판매원의 직업 정신에 감탄해서 꿈을 하나쯤 사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거의 모든 장르의 꿈을 취급하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매대에 진열된 꿈들은 팔려야 할 상품일 따름이다. 애초에 아무리 좋은 의도로 설계된 꿈이라고 하도 모든 잠든 이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한다. 이 이야기는 오늘밤의 꿈이 필요한 고객만큼이나 그들을 위해 일하는 꿈 산업 종사자들을 창작자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그러므로, 연말마다 개최되는 '꿈 그랑프리 시상식'은 모두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 해동안 수고해 온 제작자들의 영예를 제대로 기리기 위한 날이기도 하다. 수상 결과는 공정할 뿐더러, 작품성만큼이나 상업성을 중시하는 걸로 그려진다. 잘 팔리는 꿈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욕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잠들기 전의 세계와 잠든 후의 세계가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거죠
그러나, 《달러구트 꿈 백화점》 속 손님들은 자신이 꿈을 사러 무려 백화점씩이나 방문했다는 사실을 잠에서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한다. 어젯밤 판매원과 몇 마디를 섞었다가 가장 내밀한 속내와 무의식까지 들켜버린 대부분의 손님은, 오히려 현실에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지 못하므로 홀가분하다. 이러한 설정은 애플 TV+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의 주인공 '마크'를 연상시킨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SF 스릴러인데, 깔끔하게 단절되는 건 한 사람의 직장생활과 사생활이다. 마크는 회사에서 최고 등급의 보안 부서에 소속되어 있는데, 어느 날 사측이 제공하는 특별한 시술을 받아 회사 안팎의 뇌를 분리시키고만다. 회사에서 해야 하는 어떤 중요한 일의 보안 수준을 지켜내는 대가로, 그는 금전적으로 높은 보상을 받는다. 마크의 사생활이 얼마나 버라이어티하든 혹은 사사롭든, 그는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일상에서의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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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le tv+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크와 동일한 결심을 내린 동료들이 함께 근무하는 부서는 모든 게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다 못해 한치의 생활감도 없다. 드라마에는 내내 건조하다 못해 기계적인 배경음악이 깔린다. 마크가 회사에 출근해 보안 부서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곧바로 자기 자리를 찾아 복도를 걸어 나갈 때 들려오는 음악만이 유일하게 산뜻하므로, 그의 24시간을 구성하는 두 세계는 더욱 대비 된다. (그 산뜻한 노래의 제목은 다름 아닌 'Labor of Love'이다.)
상대에게 비밀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 "사실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라는 말머리를 붙이고도 기어이 말을 이어 나가게 되는 그런 아찔한 순간이 있다. 마크처럼 결심한다면, 더 이상 그런 말들을 하기 전에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을 정교한 기준으로 끊임없이 분류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단절된 두 세계는 그만큼 간편하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삶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도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는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가끔 어떤 손님은 자신의 지난밤 꿈을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대개는 '꿈보다 해몽'이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문을 열고 손님이 입장한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2층의 담당 판매원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잡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데 꿈은 다음에 구입하시는 게 어떨까요? 꿈의 선명도가 떨어진답니다. 이럴 때는 그냥 숙면하시는 게 좋죠." 이 대사는 무척 흥미롭다. 잡생각이 끼어들어서 꿈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건 어디까지나 고객 과실이며, 그 꿈을 판매한 위탁처로서의 백화점은 책임을 피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스템은 고객이 꿈값을 후불로 지급한다는 점이다. 각자가 꿈을 꾸면서 느낀 감정('설렘', '자신감')이 이야기 속 기본 화폐단위인 ‘고든’으로 환산되는 식이다. 즉, 언제까지나 정산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꿈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듯해 보이는 꿈을 구매해가서는, 어느 날 잠에 문제가 생겨서 민원을 제기한다. 최근에 가늠해 보기로 가장 섬뜩한 미래의 일은 김기창 소설 '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수록작)에 등장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아침 출근 시간부터 28도를 웃도는 날씨로, 주인공은 갓 9급 공무원이 되어 민원을 처리하는 '용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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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접수되는 민원의 대부분은 폭염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앞집 에어컨 실외기 바람이 우리 집 거실로 자꾸만 들어온다고, 고장 난 노인정의 에어컨을 빨리 고쳐 달라고, 길가에서 더 잦은 간격으로 무더위 쉼터를 설치해달라고 주민센터에 와서 따져 묻는다. 어렵사리 사회생활을 시작한 용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왜 하필 역사상 최악의 폭염이 들이닥쳤을 때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일까?" 이야기를 읽던 나는 생각한다. 지구는 지금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데, 내가 곧 마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더위 때문에 참을성을 잃으면 어쩌지? 이성적인 전략가의 사고방식이 '폭염'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이겨낼 수 있을까?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도 다양한 민원이 쌓인다. 꿈 때문에 얕은 잠을 잤다거나, 꿈을 꾸다가 기분 나쁘게 잠에서 깨어났다는 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을 꾸다가 오히려 식욕이 더 왕성해져서 살이 찌게 됐다는 손님의 불평불만을 읽을 때면,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걸. 그리고 우리가 꿀 수 있는 꿈의 종류는 그만큼이나 다양하게 남아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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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못다 한 이야기는 2022년 12월, 도우넛(DAWNUT)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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