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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일단 옛날 페스티벌 얘기
ㅎㅇ 윤하님, 안녕하세요. 먼저 우리가 태어나 처음 가 본 페스티벌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이야기를 나눠보면 페스티벌을 향한 애정을 가능하게 한 계보를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2014년의 '제2회 시티브레이크'(Citybreak) 였어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고 비가 많이 왔습니다. 슈퍼콘서트 시리즈로 팝스타들의 내한 공연을 꾸준히 성사시켜왔던 현대카드가 론칭한 락페라는 점에서 초반에 화제가 됐었죠. 제가 간 해의 헤드라이너는 헤비메탈계의 전설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이었는데요. 오지 님께서 거대 호스로 관객들을 향해 마구 물을 뿌리시더라고요. 그 날 하루종일 비가 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것이 제가 뮤직 페스티벌에 대해 가지게 된 강력한 첫인상입니다. 몸이 물에 젖은 미역 같았기 때문에 '이런 데를 자발적으로 다시 또 오게 될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윤하 이거 얘기하면 나이가 나오는데…(부끄럽) 전 2000년의 '제2회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이하 '쌈싸페')에요. 1회에 이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렸고 입장료가 1,000원이었어요. 음악 좋아하는 애들은 다 놀러 오라고 쌈지 사장님이 깔아준 놀이판 같은 거였다고 봐요. 당시 홍대 클럽을 들락거리던 시절이었는데, 페스티벌에 입장해서 정말 신세계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종일 음악이 멈추지 않고, 지하 클럽과 달리 야외니까 공기는 쾌적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자세로 음악을 즐기고요. 그래서 이듬해인 2001년의 3회 쌈싸페에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ㅎㅇ 쌈싸페가 출연진들을 '숨은고수', '무림고수', '물 건너온'으로 나누어서 소개했었잖아요. 특히 해외 아티스트들을 ‘물 건너온’이라고 한 게 몹시 재밌는데요. 자원봉사로는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윤하 사진, 운영, 취재 파트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 취재로 지원했고요.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지금도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인 대중음악평론가 김학선님을 처음 만나기도 했어요. (덕분에 학선님은 저를 업어 키웠다는 말을 아직도 하고 다닙니다. 자기가 쌈지 사장님도 아니면서!) 아무튼, 쌈싸페 취재를 하며 음반 리뷰와 공연 후기를 작업했고, 그대로 쌈지에서 당시 운영하던 인터넷 음악방송국 '쌈넷'의 객원필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 평론 일을 시작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첫 페스티벌 경험이 지금까지 제가 이 일을 하는데 꽤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네요. 2001년 언니네 이발관 공연의 조온습이 아직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페스티벌의 한 장면으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상 고조선에서… 김윤하였습니다….
ㅎㅇ 윤하님은 꼭 일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관객으로서는 물미역이 되었던 저와 달리 첫 페스티벌 경험부터 꽤 좋으셨던 거네요.
윤하 지금까지 계속 페스티벌을 즐겨 찾는 걸 보면, ㅎㅇ님도 그 후로 마음에 드는 페스티벌을 만나신 걸까요?
ㅎㅇ 저는 일본 공연장의 음향이 국내의 것보다 더 좋다는 이상한 풍문을 듣고서 2016년에 도쿄에서 열린 '썸머 소닉'(SUMMER SONIC, 이하 '썸쏘')에 갔었는데요. 가게 된 이유는 당시 발매되었던 라디오헤드 9집의 첫 트랙인 'Burn the Witch' 때문이었어요. 이 곡을 라이브로 보고 싶다는 것 하나 때문에요. 케이팝만 듣던 저는 그전까지 라디오헤드 노래라고는 암 어 크립… (애잔하게) 카르마… 폴리스…… (무기력하게) 밖에 없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락밴드가 현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그래서 라디오헤드가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문제는 제가 썸쏘 푸드 부스에서 시켜 먹은 회덮밥 때문에 된통 장염에 걸려서 라디오헤드가 무대에 오를 때는 땅에 누워서 봤다는 거죠. 주변 관객분들이 포카리스웨트 나눠주시고 그랬어요. 그래서 음향이 좋고 말고를 따질 수가 없었어요. 저는 비를 맞거나 탈진하거나 둘 중 하나였네요.
윤하 지금 페스티벌 희망 편 대 절망 편 아니에요? 그러고도 페스티벌을 사랑하다니 알고 보니 ㅎㅇ님이 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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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오락가락해도 락이다
ㅎㅇ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윤하님은 2023년 썸쏘에서 뉴진스를 보고 오셨었죠.
윤하 그것은 마치 불지옥 속의 천국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 몸이 불타올라… 근데 음악은 달콤해…. 뉴진스 무대가 정오였는데, 도쿄 8월의 일일 기온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요. 체감 온도 40도 넘는 더위였는데 오로지 뉴진스를 보기 위해 도쿄의 마쿠하리 멧세로 육신을 이동한 저…. 사실 그 전날 만반의 준비를 다했거든요. 돈키호테 가서 쿨토시 사고, 이마에 부착할 수 있는 열 내림용 패드도 사는 등등 무장을 했음에도 내리꽂히는 도쿄의 태양은 조금도 저를 봐주지 않았다…. 공연 끝나고 발밑에 내려둔 물병을 집었더니 거의 끓는 물이 들어있더라고요. 그런데 공연장 들어가면서부터 밴드 리허설이 들리는데 너무 부드럽고 달콤한 연주가 나오는 거에요. 무대가 계속될수록 다니엘과 혜인의 얼굴이 시뻘게져 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매 곡 전주를 시작할 때마다 이렇게 모든 곡을 다 알고 있고 심지어 춤까지 다 알고 있는 아티스트의 첫 일본 페스티벌 출연을 보는 일이 또 있겠나 싶은 마음이었고요. 그 마음이 저뿐이 아니라는 기운이 온 공연장에서 느껴져 조금 뭉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ㅎㅇ 체감온도 40도요? 생수 공급이라든가 의료진 대기 인프라 같은 건 잘 되어 있었겠죠?
윤하 너무 웃겨. 진짜 우리 ㅎㅇ님은 초J답게 오로지 준비! 그리고 준비만을! 퇴장할 때 출구 파트에서 의료진이 쓰러진 관객들을 대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쓰러진 인원이 많아서 감당 불가 상태였던 것 같기는 했습니다. 현지 뉴스에서 대서특필 된 사건이기도 했죠.
ㅎㅇ 올 6월에 영종도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열린 '아시안 팝 페스티벌'(ASIAN POP FESTIVAL, 이하 '아팝페')에서는 첫날 엄청난 폭우가 왔는데요. 주최 측에서 입장할 때 우비를 배부해주셨는데, 우비 입은 사람은 페스티벌 관객이고 안 입은 사람은 파라다이스호텔 투숙객이었던 게 너무나 확연히 구분 가능해서 웃겼습니다. 그 이후로는 내내 적당한 먹구름이 드리워져서 야외에서 공연 보기에 참 좋았고요.
윤하 그래도 요즘 페스티벌들은 잔디나 흙 관리를 잘하는지 비가 내려도 뻘밭이 안 되는게 저는 좀 신기해요. 2000~2010년대의 락페들은 우천 시 장화가 필수였거든요. 비가 멈추면 그 즉시 무더위가 작렬하면서 흙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ㅎㅇ 2023년 가을에 '부산국제록페스티벌'(Busan Rock Festival)에 갔었는데 메인 스테이지와 서브 스테이지 사이에 원래도 늪이 있는데다 그 때도 비가 와서 금방 웅덩이가 생기더라고요. 해가 지면 안전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브가 등장해서 울고 싶을 때… 너무나 속상할 때… 라면서 '너 그럴때면...'을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초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듣던 음악을 처음 라이브로 보게 돼서 너무 반가운데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늪…
윤하 페스티벌은 J들에게는 너무 견디기 어려운 환경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변수가 너무 많은 곳이니까요. 이렇게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I**J ㅎㅇ님의 페스티벌 사랑.
ㅎㅇ 오히려 끊임없는 변수들을 마주하면서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경험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웬만한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보다 페스티벌에 한 번 다녀오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엄근진)
윤하 J를 강하게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 페스티벌 팔찌를 끼고 안경을 반짝 치켜들고 있는 ㅎㅇ님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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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일행 구하기
ㅎㅇ 윤하님과 같이 얘기해보고 싶었던 진짜 주제는 바로 이것인데요. 페스티벌에 같이 갈 일행은 어떻게 고르시나요? 물론 이 질문을 던지는 즉시 스스로 좀 재수가 없긴 한데요. (웃음) 내가 누구를 골라? 그래도 일행을 꾸릴 수 있는 선택지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가정 해보죠.
윤하 예전에는 SNS나 단톡방 같은 곳에 "가는 사람?" 불러서 대충 팟을 짰어요. 친구의 친구 등등과 어울렁 더울렁 같이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제 몸뚱이만 갑니다. 일단 가면 아는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어 있더라고요. 오히려 제 쪽에서 가자고 청한 친구와 가게 되면 그 친구가 재밌게 놀고 있는지 계속 신경 써야하고, 혹은 제가 현장에서 다른 지인을 만나게 되면 혼자 소외감 느낄까봐 마음이 많이 쓰여서 불편하더라고요. 이래 봬도 소심한 E입니다...
ㅎㅇ 저는 페스티벌 자체가 부대 비용(입장료, 식비, 숙소, 교통비 등등)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선뜻 아무한테나 "가자"고는 말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진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시작하는데…… 그 "음악을 사랑한다"는 게 너무나 주관적이잖아요? 그래서 '적정선을 넘어서는 환기'가 필요하다든가 '쎈 자극'을 원하고 있는 지인으로 레이더를 좁히게 됩니다. 평소에 밥을 먹다가 상대가 그런 것들을 원한다고 말하면 낼름 페스티벌을 추천하고는 해요. 그래서 결국 같이 가면,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죠. 동행인의 만족도를 속으로 셈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여행 투어 프로그램의 가이드 같은 마음으로….
윤하 그럼 정작 ㅎㅇ님은 온전히 못 즐기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것들이 제가 페스티벌에 집중을 못 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라는 걸 알게 돼서 언젠가부터 안 하게 되더라고요.
ㅎㅇ 근데 저는 상대가 만족하는 걸 보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제가 페스티벌을 무리 지어 갔던 경험이 딱 한 번 있는데요. 인턴을 같이 했던 동기들이 각자 다른 조직으로 흩어지고 난 후에 한 번 만나자 만나자 하다가 다들 바쁘고 만남을 위한 중간 지점을 잡는데에도 애를 먹으면서, 결국 2018년의 '서울재즈페스티벌'(Seoul Jazz Festival)이 약속 장소가 된 거예요. 저는 그 때 크게 무대에 집중하진 못했고요. 계속 먹고 마시기만 했던 것 같네요.
윤하 무리 지어 가면 아무래도 구성원들을 의식하게 되고 맘껏 공연을 못 보게 되는 단점이 있죠. 저와 페스티벌에 같이 가는 친구들은 돗자리를 마치 휴게소처럼 알아서 놀다가 각자 와서 쉬다 먹다 가는 장소로 봅니다. 베이스캠프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타이밍 맞는 사람들끼리 수다 떨고 이것저것 사 먹고.
ㅎㅇ 무리로 가는 페스티벌은 역시 무리다…. 그럼 윤하 님은 일단 갈 땐 혼자 가더라도 가서 꼭 아는 사람을 하나둘씩 만나게 된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혼자 정오부터 자정까지 페스티벌을 즐기시는 것도 괜찮으신 거예요?
윤하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본적이 없네요. 좀 심심하긴 할 것 같아요. 중간중간 인류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이벤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ㅎㅇ님은 페스티벌에서 자연스럽게 친구를 만나거나, 친구의 친구와 인사를 하거나, 함께 공연을 보게 되는 경우가 전혀 없었는지 궁금한데요. 인스타 스토리를 보니 내 친구가 같은 페스티벌에 온 걸 알게 돼도 스루하는 건가요?
ㅎㅇ 저는 실시간으로는 스루하는 편이고, 밤에 숙소나 집에 돌아가면서 "오늘 그 무대 보신 것 같더라고요 저도 봤는데 진짜 쩔었죠!" 이런 사후 DM을 보내는 편입니다.
윤하 그럼 저 같은 사람은 "아 왜! 연락 안 했어요!" 같은 DM을 보내게 된다고요! 저는 딱히 만나지 않게 되더라도 아는 사람이 페스티벌에 왔다는 걸 SNS에서 보게 되면 일단 먼저 DM은 보내놓아요. "헉 오셨어요?"
ㅎㅇ 제가 실시간으로 "어디세요?"를 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어 내가 '너무나 현실계에서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페스티벌까지 와서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모든 가정법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윤하 그러니까 저는 그런 걸 감안해서 "이따 5시에 그 스테이지 앞에서 꼬옥 봐요!"라고 하지는 않아요. 대신 상대에게 볼지 말지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헉 오셨어요?"
ㅎㅇ 각자 즐길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군요. 근데 올해 아팝페에서 저희 진짜 우연히 마주쳤었잖아요. 오후 6시쯤, 제가 연달아 세 타임을 보고 몹시 지쳐있을 때.
윤하 그러다 보니 더욱 순수하게-페스티벌에-기가-쪼옥 빨린 I스러운 ㅎㅇ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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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외까지 가?
윤하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으로, 미국으로, 스페인으로 페스티벌을 보러 가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ㅎㅇ 저는 해외 페스티벌에 가면 '내가 모르는 팀이 진짜 많이 나온다… 음악을 듣다가 죽겠구나…'를 절실히 깨닫습니다…. 달리 말하면, 다녀오고 나서 플레이리스트가 풍족해져서 좋다는 것인데요. 케이팝만 듣던 제 입장에서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이 수상할 정도로 다국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거죠. 페스티벌 주최 측이 라인업을 미리 공개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아티스트가 있으면 어느 정도 대표곡을 예습하고 가려고는 하는데요. 물리적으로 워낙 많은 팀이 있으니 그럴 수가 없고, 저는 오히려 다녀온 후에 복습을 더 많이하는 쪽 입니다.
윤하 저는 한국에서는 절대 못 볼 아티스트들을 보러 가는게 제일 큰 이유이긴 하거든요.
ㅎㅇ 2023년에 '코첼라'(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에 갔을 때 한국인들로 구성된 에어비앤비에 잠시 머물렀었는데요. 얘기를 나눠보니,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이 절대 내한을 안 해서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코첼라까지 오게 됐다고 토로하는 분들이 다수였어요. 근데 프랭크 씨가 1주차 무대에서 깽판을 치셔가지고 2주차에서는 라인업에서 사라져버린 거죠. 저랑 숙소 공유하는 분들은 다들 2주차를 기다리고 있는 관객이었고요.
윤하 아, 역사를 함께하셨네요. 역대급 헤드라이너 사건이었죠.
ㅎㅇ 저는 그때 코첼라 실무자들이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주동안 동일한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하기로 셋팅 되어 있는데 갑자기 빈 자리가 생긴다면? 헤드라이너라 주어진 공연 시간도 가장 길었는데? 국내 페스티벌에서 유사한 일이 생기면 어떤 식으로 전체 공지가 나왔을까를 상상해보게 되더라고요. 관객들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납득시킬 것이며,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윤하 예습-복습도 그렇고 ㅎㅇ님은 페스티벌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을 실무자 입장에서 임하시는 것 같아요.
ㅎㅇ 2023년 썸쏘에서 윤하님이 블러(Blur) vs 썬더캣(Thundercat)의 타임테이블이 겹쳐서 엄청 고민하셨던 게 떠오르네요. SNS에서 둘 중에 어디로 갈지 골라 달라고 즉석 투표 하셨었잖아요.
윤하 썸쏘에는 '소닉매니아'라는 전야제 공연이 있는데요. 거기서 썬더캣을 보고 본 페스티벌에서는 블러를 보면 모든 게 완벽했겠으나 일정이 안 맞았어요. 페스티벌은 늘 그런 아쉬움들을 조금씩 남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최대한 챙겨 보려고 했지만 현장에서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저는 P라 괜찮지만 ㅎㅇ님 같은 J들은 같은 상황에서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ㅎㅇ 그래서 페스티벌이라는 게 '꿈의 라인업'을 꾸리는 것보다도 '꿈의 타임테이블'을 짜는 쪽이 더 어렵지 않나 싶어요. 꼭 보고 싶었던 팀을 모두 다 보고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한편으로,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뒤로하고 차선을 선택했을 때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기억을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윤하 맞아요. P의 심장이 웁니다…. 우연히 만난 무대가 나의 인생 무대가 되는 것만큼 짜릿한 경험이 또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페스티벌의 순기능이 그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의 발견.
ㅎㅇ 국내 페스티벌에는 티켓 분철 문화가 있잖아요. 페스티벌 팔찌가 둘 이상의 사람들에게 양도 되면서 티켓의 비용을 일부만 부담하는 방식인데, 기묘한 문화 같거든요. 이게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페스티벌에는 내가 꼭 보고 싶어하는 특정 아티스트를 보는 짜릿함뿐 아니라 입장 후 나의 하루를 통째로 쓰면서 마주하는 미지의 아티스트들을 보는 재미 또한 있는 것이니까요. 혹시, 분철 문화가 해외 페스티벌에서도 일반적일까요?
윤하 저도 해외사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나라나 한 푼이 아쉬운 젊음들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도 지양했으면 하는 문화이긴 해요. 페스티벌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좋아하는 것만 쫓는 경험도 충분히 뜨겁고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 시야를 넓혀보시는 것도 긴 인생에서 봤을 때는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그 새로운 세상에 여러분의 새 최애가 있을지도?
ㅎㅇ 최애와 새로운 발견의 연장선상에서, 올해 6월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관람하신 '프리마베라'(Primavera Sound)는 어떠셨나요?
윤하 2014년에 프리마베라에 처음 가봤는데 올해가 방문 10주년이 되는지라 개인적인 의미가 컸어요. 특정한 팀보다도 PJ 하비(P.J. Harvey) - 미츠키(Mitski) - 시저(SZA) - 로이신 머피(Roisin Murphy)로 이어지는 여성 음악가 라인업이 너무나 만족스러웠어요. 전 이런 것도 페스티벌 기획자가 욕심을 부려볼 수 있는 기획의 묘라고 생각해요.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언가를 관객에게 전해주는 것이요! 또 하나, 이번 프리마베라에서는 실리카겔의 페스티벌 데뷔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의지가 컸는데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셋리스트를 보여줘서 내심 놀랐습니다. 평소 국내 무대에서 실리카겔이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선곡들과 견주어본다면, 프리마메바 무대는 상당히 멜로딕하고 부드러운 곡들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기타나 드럼이 작렬하는 곡들은 거의 다 빼고요.
ㅎㅇ 전반적인 관객 분위기는 어땠나요?
윤하 혹시 공연만 집중해서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프리마베라는 애저녁에 포기하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그곳은 그냥 거대한 스페인 시장통이에요. 그런데, 실리카겔 무대 때 제 옆에서 거의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귀여운 스페인 남자 관객분이 있었거든요. 그분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말았는데 작은 후회 중 하나입니다. 그 분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공연 봤거든요. 혹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연락주세요?
ㅎㅇ 스페인 분이 한국어로 된 뉴스레터를 읽고서 연락을 취하는 일…. 그래요, 세상 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윤하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ㅎㅇ 해외 페스티벌에서 주변 관객 때문에 공연을 더 재미있게 보는 경험이 저한테도 있습니다. 2년 연속 코첼라에 가면서 2023년의 블랙핑크, 2024년의 르세라핌 라이브 공연을 본 시간은 제게도 참 각별하게 남아있고요. 두 팀은 코첼라에서 주어진 스테이지의 규모도 각자 활동 연차도 달랐지만, 역시 등장할 때 글로벌 팬덤이 환호해주는 게 동일하게 격렬하고 또 따뜻해서 저도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어요. 원래 떼창 자체가 신나는 것이지만, 조금씩 미묘한 어조와 강세로 이루어진 다국적 발음이 섞여드는 떼창의 일원이 되는 재미. 정말 큽니다.
윤하 내 가슴 안에서 작은 태극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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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잃어버리고, 찾아라
ㅎㅇ 무대 얘기를 실컷 했으니 페스티벌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봐야겠죠. 페스티벌에서 먹고 마시는 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인데요. 일단 저는 정말 잘 먹어요. 출발하면서 피로회복제를 복용하고, 가급적 점심, 저녁을 때맞춰 챙겨 먹습니다. 이틀이나 사흘 단위로 관람하면 메뉴도 어제랑 겹치지 않게 주문하려 하고요. 물론, 이럴 때 이것저것 메뉴를 소분할 동행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유일하게 하게 되는데요.
윤하 전 배고플 때 먹어요. 실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먹어두는 게 크지만요. 그래도 푸드 라인업이 좋은 페스티벌에 가면 그 페스티벌에 대한 호감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푸드 존까지 신경을 쓴다는 건 페스티벌의 기본이 잘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ㅎㅇ 이쯤에서 아직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PENTAPORT ROCK FESTIVAL, 이하 '펜타')에 가본 적 없는 제가 조심스레 질문합니다. 펜타의 김치말이국수 진짜 그렇게 맛있나요.
윤하 김말국을 안 먹어봤어요? 맙소사. 페스티벌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꼭 드셔 보시길 바랍니다. 7말 8초 작열하는 태양 아래 얼음이 동동 떠 있는 김말국 국물 한 번 쭉 마시면…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 어떤 헤드라이너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ㅎㅇ 이야, 1 김말국 = 1 헤드라이너 설인가요.
윤하 2000년대 초반의 쌈싸페는 심지어 관객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나눠줬거든요. 샘표에서 나눠준 귤 통조림이 너무 맛있어서 몇 번이고 받아 먹었던 것 같아요. 공짜라서 더 맛있기도 했지만 귤 통조림 자체가 달고 시원하잖아요. 페스티벌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메뉴였어요. 메뉴 고심하고 있는 업체 분들이 있다면 한 번 과일 통조림을 고려해보십사…. 그리고 페스티벌에 가면 다른 때보다 맥주가 더 맛있죠.
ㅎㅇ 둥그렇게 모여서 잔 들고 짠 하는 사진이 페스티벌에 놀러 간 사람들의 SNS에 정말 많이 올라오곤 하죠. 나는 내 눈동자랑 건배하는데.
윤하 저는 이쯤에서 궁금합니다. 둥그렇게 모여서 짠하고 싶나요, 아니면 영원히 내 눈동자와 건배하고 싶나요? (I를 원에 포섭하고 싶은 E의 조심스러운 접근)
ㅎㅇ 각자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물론 전자도 좋습니다.
윤하 저는 어디든 초대할 몸과 마음의 준비가 늘 되어 있거든요. 말씀만 주십쇼.
ㅎㅇ 감사합니다. 페스티벌에 동행인이 있으면 좋은 점 중에 또 하나로는 분실물이 발생했을 때 같이 찾아줄 수 있다는 점에 있네요. 그동안 제가 실제로 뭘 많이 잃어버렸어요. 'DMZ 피스 트레인 뮤직 페스티벌'(DMZ PEACE TRAIN MUSIC FESTIVAL, 이하 'DMZ')에서는 애착 셔츠를 잃어버렸다가 행사 끝나고 찾았고요(분실물을 저희 집에 택배로 보내주셨어요). 코첼라에서는 한 번 쓴 선글라스를 분실해버렸죠. 코첼라는 행사 기간 내내 전용 앱에서 실시간으로 분실물 리스트를 업데이트 해주는데요. 거기에서 안경 항목을 클릭했더니 막 잃어버린 안경과 선글라스가 100개 넘게 올라와 있어서 놀랐습니다.
윤하 전 의외로 짐은 잘 잃어버리지 않는데요. 그 이유는 짐을 거의 가져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페스티벌에서는 짐이 말 그대로 짐인 걸 알아서 최소화하려는 편이에요. 손바닥만 한 크로스 백에 카드, 물티슈, 립밤 정도만 챙기고요. 겉옷도 안에서 사서 입습니다. 페스티벌 공식 굿즈를 사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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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페스티벌 기획자 U
ㅎㅇ 페스티벌의 주인공이 아티스트와 관객 모두라는 수사를 넘어서서, 요즘은 기획자에 관한 샤라웃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누가 이 분들을 다 모았는가. 누가 벌인 판인가?
윤하 저는 잘 기획한 페스티벌일수록 기획자의 성격과 성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요. 대표적인 게 올해 상반기에 열린 DMZ와 아팝페입니다. 두 페스티벌 모두 호평이 많았는데 그 호평의 방향이 전혀 다른 게 좀 재미있더라고요. 다녀오신 분들의 반응을 거칠게 말하자면, DMZ는 ‘모든 게 자유로운 지상 천국’이고, 아팝페는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는 점이었어요. 저는 이런 것들이 페스티벌을 만든 사람들이 가진 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평가라고 보았는데요. 아티스트 라인업 선정부터 페스티벌 운영까지 전반적으로 기획자들의 개성이 확실히 드러났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가 보인다는 점에서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했어요.
ㅎㅇ 최근에 전반적으로 페스티벌들의 색깔이나 지향점이 비슷해 보이는 것에 대한 일부 관객의 불만들이 터져나오고 있기도 하잖아요.
윤하 규모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대형 페스티벌에서는 앞서 언급한 점들을 느끼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데요. 주최 측이 전체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섭외해야만 하는 아티스트 라인업이라는 게 있고, 그건 행사의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 소소한 매력들은 자연스럽게 옅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요.
ㅎㅇ 유튜브 <머니그라피>에서 DMZ를 기획하신 이수정 감독님이 "(이 행사는) 돈과 관심이 한 군데로만 쏠려서 특정한 누구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닌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하시는 부분이 인상 깊었거든요. ‘페스티벌’이라는 단어 옆에는 늘 어쩔 수 없이 ‘자본’이 놓인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음악 듣는 사람들의 진심에 대해 이야기 하시면서 새로운 방향을 제안해주신 지점이 좀 상쾌하기까지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