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회고록',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with 반비 상실, 반전은 없음, 발견
ㅡ 《상실과 발견》과 <로봇 드림>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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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에 우연히 '한국의 연령별 인구와 운전면허 소지자' 현황을 보게 됐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처럼 면허를 따지 않고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며 뻐기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에 이 자료가 반가웠다. 그래프를 살펴보니, 20세부터 80세 사이에 '무면허자 비중이 가장 낮은 연령'은 30대 중반이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30대 중후반 중에는 오직 5.76%만이 면허가 없다. 물론 약 94%에 달하는 다수의 이들 중에는 면허증을 장롱에 처박아 둔 이가 있을 것이고, 여행할 때만 렌터카의 운전대를 잡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막연히 예상한 것보다도 동년배 중에 면허보유자가 많다는 사실이 은은한 충격이었다. 나와는 30대 중후반 + 무면허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전현우 교통·철학 연구자도 이 그래프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그리고나서 그는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동 수단을 이용해 어린이나 노인을 돌볼 책임도 지고 있는 연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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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매일 거대 도시로 향하는가》, p.62 참고
나는 저 문장을 본 이후로 시민으로서 뭔가를 빠뜨리고 살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아직도 면허가 없어? 넌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다, 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문장의 위력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일주일 전에 우리집 마루에 앉아있는 나를 습격했다. 아빠가 갓 경미한 허리 디스크를 진단받아 내 딴에는 잔소리를 좀 늘어놓게 되는 날들이었다. 하루 이틀쯤 아빠의 거동이 불편해 보였고(그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선의로 시작한 한마디가 말싸움으로 번졌고(말싸움은 원래도 많이 한다), 곧 아빠는 스스로 병원으로 걸어 가서 통원 치료를 다니시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자신의 아빠를 떠나보내면서 느낀 상실감에 대하여 딸의 관점에서 집요하게 서술하고 있는 캐스린 슐츠의 회고록 《상실과 발견》을 읽고 있었다. 살아있는 아빠와 끊임없이 싸우는 와중에, 이미 상실한 아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94%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성한 자식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노화를 맞닥뜨리리는 장면에 직간접적으로 놓이는 건 꽤 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책에서는 "졸업식 참석, 결혼식에서 춤추기, 새로운 집들이, 그간 구축해온 인생 돌아보기, 집필한 책 읽기, 아이들 만나기"(p.103) 같은 것들을 살아서 충분히 누리지 못한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덜컥 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아빠가 운전을 못 할 상황이 올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제 나도 진짜 면허를 따야 하는 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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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ㅣ반비
면허 취득 여부는 허리가 불편한 노인이나 갑자기 열이 오르는 어린이를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갈 가능성 외에도, 세상만사에 더 많은 기여를 해낸다. 그것은 때로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 된다. "우리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만났다. C는 400킬로미터를 운전해 왔는데, 나를 만나려던 건 아니었다."(p.145) 캐스린 슐츠는 여러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데,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견딜 수 있도록 해준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8개월 전에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것은 미국 세 개의 주를 넘어서서, 그러니까 평소라면 전혀 마주칠 일이라고는 없는 원거리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캐스린의 동네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는 일이다.
이 책의 초반에 C의 존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딱 한 줄 뿐인데다 조연도 아니고 거의 엑스트라 1처럼 쓰여있다("배우자가 차에 타는 것도 두고볼 수 없을 정도였다."(p.74)). 전체 분량이 301쪽인 《상실과 발견》에서 우리는 145쪽이 되어서야 캐스린이 C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전까지 캐스린은 아버지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주의할 것은, 캐스린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책의 절반 지점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그럴듯한 반전 서사의 주요 재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진짜 반전은 2장 마지막 페이지에 있다!)
캐스린은 "부작용 초래를 다루는 약, 부작용을 막는 약이 야기할지도 모를 부작용을 다루는 약"(p.53) 에 둘러싸인 아버지를 병원이라는 장소에서 애도했던 일에 대해 말한다. 정확한 진단이 없고, 예후도 확실히 알 수 없는 기간을 지나면서 혼란을 겪은 그의 가족들이 다가오는 상실을 각자 시차를 두고 받아들이거나 튕겨내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애도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보기와는 달리 그것이 슬픔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순간을, 그러다가도 기분이 나아졌기 때문에 참담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오간다. 그러면서 "상실이란 얼마나 거대하고 곤란한가"(p.16) 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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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과 발견》의 목차
동시에, 이 책은 상실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마주한 새로운 사랑의 역할을 과장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큰 힘이 되어준 덕분에, 그 거대하고 곤란한 시간을 완벽하게 건너갈 수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어느 무엇도 그의 눈 앞에서 상실을 치워버리거나 없앨 수는 없다. 상실-발견-그리고 순으로 구성된 이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캐스린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발견할까? 많은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나는 싱글일 때 이 질문을 난처하게 여겼다. 사랑이란 어쨌거나 잃어버린 무엇이 아닌 것이다. 걸음을 되짚거나, 주변을 샅샅이 훑는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p.139)
2.
영화 <로봇 드림>의 '도그'와 함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면 좋겠다. 이 영화는 1980년대 뉴욕의 1인 가구주 도그네의 적막한 밤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격렬한 헤비메탈 록 무대가 흘러나오는 음악 방송도, 관객들의 웃음이 흩어지는 시트콤 드라마도, 효과 좋은 염색약이나 뭐든 잘 썰리는 칼 광고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외로우신가요?"라는 홈쇼핑 광고 카피에 순식간에 현혹되어 버려서, AMICA 2000이라는 모델명의 '로봇'을 구매하기까지 크게 고심하지 않는다. 곧 거대한 택배가 도착한다. (택배 기사님이 다가오는 장면에서 낯선 사람을 향해 으레 강아지가 그렇듯, 도그는 적극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걸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썩 괜찮은 충동구매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그는 로봇이 몹시 마음에 든다. 로봇과 함께하는 도그는 그제야 영화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실내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뉴욕의 랜드마크 곳곳을 보여줄 용의가 있다. 그들은 록펠러센터 전망대에서 뉴욕의 전체 뷰를 조망하고, 브루클린 브릿지의 야경을 바라보고, 한낮의 센트럴파크를 걷는다.
어느 날 그들은 근교의 해변으로 가서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초저녁이 되니, 아무래도 해변에서 소금물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로봇이 방전되어 버린다. 이 순간, 로봇은 도그의 힘으로는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는 중량의 고철 덩어리라는 잔인한 진실이 드러난다. 도그는 로봇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혼자 해변에 남겨진 로봇 쪽에 감정 이입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위기 상황에서 가능한 해결책을 찾는 데에 전념하는 도그에게 좀 더 몰입하게 됐다. 도그는 갖은 수를 써보지만, 관료주의의 벽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진심이란 개인의 사정일 뿐이다. 내년 여름이 올 때까지 해변이 장기 휴장에 들어서면서 일반 시민의 입장을 전면 통제하는데 여기에 예외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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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드림ㅣ영화사 진진
어쩌면 <로봇 드림>을 "만난 지 15분 만에 생이별을 하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그가 자신이 조립한 로봇과 처음으로 눈을 맞추는 순간은 영화가 시작된지 7분이 지났을 때이고, 로봇을 해변에 두고 뒤돌아서는 건 22분에 벌어지는 일이다. 《상실과 발견》 버전으로 이야기하자면, <로봇 드림>은 발견-상실-그리고의 구조를 따른다. 책에서는 상실이 먼저지만, 이 영화에서는 발견이 우선하고 상실은 그다음이다. 외로운 도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로봇을 찾아내고, 어느 날 로봇을 잃어버린다. 이 책은 전에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되찾음(recovery)'과 전에 한 번도 잃지 않았던 걸 찾는 '발견(discovery)'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을 알려준다. "되찾음은 현상복구이고, 우리에게 질서를 회복해준다. 발견은 대조적으로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킨다. 뭔가 돌려주는 대신에 새로운 것을 안겨주는 것이다."(p.111) 라는 것. 그렇다면, 둘의 관계성을 이렇게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도그는 어느 날 잃어버린 로봇을 되찾아오려고 애쓴다.
도그가 로봇을 찾는 동안 로봇 또한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꿈을 자꾸만 꾼다. 로봇은 세 차례나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장소인 도그네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은 늘 꿈이다. 그에게는 '아, 또 꿈이었구나'를 깨닫는 루틴이 생긴다. 해변에 꼼짝없이 누워 사계절을 겪는 로봇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비한 선원들, 호기심 많은 새 무리들, 탐욕스러운 도굴꾼을 향해 기대, 실망, 신뢰, 체념을 반복할 만큼 충분히 감정적으로 생동하는 존재지만(그런 점에서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도그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죽어가는 중이다.
<로봇 드림>은 캐스린 슐츠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지속력을 발휘하며, 가장 인기가 있다고 말한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유형의 이야기"다. 이런 탐색 서사에서 "결국 서스펜스란 대상이 저기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저기 있다는 걸 알지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찾아낼지 모른다는 데서 나타나는 산물이다."(p.127) 도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에 로봇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안다. 처음에는 해수욕장의 철조망에 가로막힌 채로 멀찍이서 몇 번이나 그를 바라보면서. 시간이 흘러 다시 해변에 입장할 수 있게 됐을 때 (으레 강아지가 그런 것처럼) 탁월한 후각을 동원해 그와 지난 번에 나란히 누워있던 곳을 정확히 찾아낸다. 그러나, 로봇은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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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상실과 발견》. 캐스린은 C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에게 청혼을 한다. 같은 시간에 캐스린의 아버지는 점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C는 캐스린에게 그의 아버지 병실에서 결혼식을 올려도 좋다고 말한다. 이때, 캐스린은 다음과 같이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다.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크나큰 슬픔과 크나큰 기쁨을 뒤섞고 싶지 않았다."(p.251)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이 책의 마지막 장 '그리고'에 등장하기 전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영어 알파벳은 27자였고, 알파벳의 가장 마지막 글자는 Z가 아닌 '&(그리고)' 였다는 점이다.
ABCDEFGHIJKLMNOPQRSTUVWXYZ&
결국, 모종의 이유로 '&(그리고)'는 알파벳에서 탈락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평소에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한 문장에 공존하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잇는다.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은 "삶은 '그리고'와 마찬가지로 연결하는 대상에 무심하다는 사실"(p.249)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닮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연결을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이 없었다면"(p.261) 우리의 삶은 한층 더 괴로워졌을 것이다. 캐스린 슐츠는 아버지를 떠나 보낸 후 상실감에 잠겨 있다. 그리고 캐스린 슐츠는 C를 사랑한다. 로봇은 도그를 찾아 나서는 꿈에서 자꾸만 깨어난다. 그리고 로봇은 현실을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온갖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가끔은 분에 넘치도록 좋은 걸 찾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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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드림ㅣ영화사 진진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가 결국 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p.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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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호에 언급된 콘텐츠
•정희원, 전현우 《왜 우리는 매일 거대 도시로 향하는가》(2024, 김영사)
•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2024, 반비)
•영화 <로봇 드림>(2023) *왓챠, 웨이브, 쿠팡플레이에서 단품 구매 가능(2024년 8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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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쳐나는 냉소주의와 절망의 바다에서, 이 책만 한 선택은 없을 것이다."(뉴욕타임즈)
🗯️ "슐츠는 익숙한 관념을 이리저리 돌려보아 우주적이고 경이로운 것이 되도록 한다. 그러면서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 회고록은 우연이 운명이 되고, 슬픔이 감사와 얽히는 방식에 대한 탐구로 전환된다. 책을 읽으며 마치 손바닥에 그려진 대륙의 지도를 발견하는 것처럼 조용히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지아 톨렌티노, 《트릭 미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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