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호를 보낸 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 사이에 이 뉴스레터를 구독을 시작하신 분들을 편의상 ‘5년째 구독중’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전체 구독자 분포도 중 5년째 구독중인 분들은 약 4.6%를 차지합니다. 이분들은 대한민국 뉴스레터 이코노미라고 불릴 수 있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역사를 ‘1인 뉴스레터 발행인’인 저와 함께 거쳐오신 분들입니다. 또한, 이분들은 다양한 읽을거리들 중에서 지금 나에게 가장 유용하게 혹은 부담없이 다가오는 것을 선별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은 분들일 것 같아요. 그동안 수신 거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여전히 받아 보고 있으신 거니까요. 그 치열한 고민의 결과가 수신 거부(내가 구독만 해놓고 안 보는 뉴스레터들 싹 다 정리하는 김에 콘텐츠 로그도 구취하기) 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수신을 유지함으로서 구독자로서의 정체성까지 유지한다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가설입니다.
이 도표를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서 바라볼 수 있지만, 저는 ‘5년째 구독중’(4.6%)인 분들만큼이나 관계를 이어간지 오래 되지 않은 약 46.8% '2년째 구독중(2022년 3월부터 2023년 2월 사이에 구독)' 27.1%+'신규 구독자(2023년 3월 이후 구독)' 19.7% 분들에게 약간의 책임을 느낍니다.
콘텐츠 로그는 구독자 설문조사를 통해 2023년 여름에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10일마다 발행에서 주 2회 발행으로 발행 빈도가 잦아진 것이었습니다. 월요일에는 정보성 레터를 목요일에는 리뷰성 콘텐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발행 시점이 들쑥날쑥해졌습니다. 어떤 주에는 뉴스레터를 한 번만 받아보셨을테고, 리뷰성 콘텐츠를 목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보신 날도 있었을 거예요. 최근 2년 사이에 콘텐츠 로그를 구독하신 분들 중에는 특히 이런 변화의 과도기를 목격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에 신규 구독자였다면 이 뉴스레터는 발행인이 좋아하는~ 랜덤 게임~ 과도 같구나라고 느꼈을 것 같기도 하고요.
2.
저는 ‘언론정보학부 신문방송학과’가 ‘미디어학부’로 재편되는 시기를 통과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직 JTBC와 채널A가 없을 때 학교를 다녔습니다. 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드라마인 <하우스 오브 카드>가 공개 되었을 당시에도 저는 학생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넷플릭스 계정 같은 건 없었고요.) 언론과 신문과 방송과 미디어를 시대의 호명에 발맞추어 공부하는동안 전공 수업에서 마주한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똑같은 내용물이 종이로, 라디오로, TV로 전달 될 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 번 그 내용물의 정체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는데요. 형식(메시지를 담는 그릇)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 이 정의는 현재의 제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뉴스레터를 쓰는 내내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는 했거든요.
나이 얘기를 자꾸 하면 나이가 든 것이라던데, 뉴스레터를 보내는동안 실제로 저는 나이를 5살이나 먹었습니다. 그럼 그동안 저의 문화적 취향이 변했을까요? 많은 것들을 보았고 제가 장바구니에 담은 수많은 책들을 소개했고 매 해 포스터가 바뀌는 영화제에 다녀온 후기를 전하는동안 저의 문화적 취향은 소리 없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건 콘텐츠와 맺는 관계가 변했다는 점입니다. 즉, 5년 전의 저는 나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콘텐츠를 위해 쓰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저라는 개인에게 주어진 생애주기에 평생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최근 (물리적으로) 유산소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제가 콘텐츠라는 관념상의 거대한 트레이드밀에 올라와서 정지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보니 나름대로는 속도 및 경사도 조절을 하면서 계속 뛰고 있는 중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그렇게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매일 본 콘텐츠들의 제목을 나열해서 공중에 배포하는 것에는 부가적인 노력이 들지 않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콘텐츠 로그의 첫 코너였습니다. 제가 이 코너를 없애겠다고 하자 “힘든 게 아니면 계속 해주면 좋겠다”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는데요.
여전히 그 코너를 작업하는 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서 없애는 게 어불성설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코너 때문에 항상 뭔가를 많이 보고, 성실하게 보는 감상자의 이미지를 얻게 됐고, 어느 지점부터는 그 이미지를 거스르기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제게 한가로운 반나절이 주어졌다고 할 때 무언가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반면, 무언가를 보지 않는 선택지를 택하기란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콘텐츠를 보지 않음으로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여지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매 번의 기로에서 그런 선택이 반복되다보니 관성이 되었고요. 그래서 저는 <월든>처럼 숲으로 가고 싶어진 걸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매일 본 모든 콘텐츠의 제목을 적어서 일주일 간격으로 오천 여명에게 보낸다’는 원칙을 고수하면 그것은 이 뉴스레터가 가진 독특한 콘셉트가 되지만, 제 삶에서는 계속해서 당연해보이는 선택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로그(log)’라는 콘셉트가 가진 매력을 느낍니다. 로그는 편집과 가공을 최소한으로 한 덕분에 한 사람의 생활양식을 거의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려는 동시대에 저항 하면서 제가 디지털 자아를 유지해나가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특히, 콘텐츠 감상자와 큐레이터 사이의 정체성을 오가는 사람이 쉽게 빠져드는 함정인 ‘그럴 듯해보이는 취향을 전시할 가능성'까지도 원천적으로 차단해줍니다.
그렇게 저는 “내가 본 것이 곧 나”라는 명제를 여전히 믿으면서도, '로그'라는 형식에서 조금 놓여나고 싶었습니다. 대신, 다른 방식의 콘텐츠 로그를 이어가보고 싶다는 결론에 닿게 됩니다.
3.
지난 해부터 유튜브 인급동(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유튜브에서 메인 화면을 건너 뛰고 원하는 영상을 키워드로 검색해서 보았고, 구독 계정 목록을 정기적으로 솎아내기도 했습니다. 유튜브에 접속(한다는 의식은 거의 희미하지만) 하는 목적 자체가 분명했던 셈입니다.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 내가 보고 싶은 영상을 알아서 찾아서 보겠다.
그러던 중 지난 해의 구독자 설문조사를 통해 “뉴스레터를 보면 볼 수록 패턴이 읽혀요”라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정확히 그런 표현은 없었지만, 4년만에 처음으로 이 뉴스레터가 신선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게 된 것이었죠. 그 말은 이 뉴스레터를 통해 “내가 미처 몰랐던”, “숨겨져 있는 보석 같은”, 동시에 “새로운” 걸 추천 받고 싶다는 구독자들의 요청이었는데 당시의 콘텐츠 로그가 그런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즈음부터 오랜 구독자와 의리를 나누는 대신 새로움을 나눌 수는 없을까, 큐레이션의 날을 좀 더 세울 수는 없을까, 라는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콘텐츠 생태계에서는 무언가가 유행하면 그걸 표절 시비에서만은 벗어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모사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동시에 틈새 시장을 노리는 창작자들, 사조, 편집법 등등이 등장합니다. 구독자들은 이미 큰 노력 없이도 화제성 높은 콘텐츠들을 다수 접하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흥행작이 아닌 틈새 시장을 찾아내서 소개할 수 있을까? 그건 역설적이게도 현재 화제가 되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이더라고요.
‘인급동’을 봐야만 ‘인급동이 아닌 것’이 가진 빛나는 가치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창작자 당사자가 아니고 창작자 독점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라면, 여러분들에게 좋은 걸 좋다고만 말해서는 설득력이 부족한 셈이잖아요. 아직 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콘텐츠를 구독자들에게 소개할 때, 시장에서의 그것이 가진 비교우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제 머릿 속에서 일어난 '인급동 동영상을 봐야하는 이유'에 관한 인과 관계들이고 그 결과가 얼마나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2023년 여름부터 저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적극적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인급동을 많이 보니 유튜브 메인 화면이 순식간에 100만 뷰수의 영상들로 가득차게 됐습니다. ‘도대체 이 영상의 조횟수가 왜 300만임?’ 싶을 때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편견 없이 접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내가 원래 좋아하는 것들도 봐야하는 데 너무 시간이 부족해서 괴롭다’는 개인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행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보는 것)과 보고싶은 것을 다 같이 보려다보니 과부하가 있었습니다. 주 8회를 보내게 되면서 한 통의 뉴스레터를 보내기 위한 작업에 드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려서 힘들어진 건 아니었어요. 본다 → 본 것을 소화한다 → 레터를 쓴다 → 본다 라는 순환은 무한으로 계속 되었는데, 의무와 개인적 선호도가 버무려져서 이전보다 양적으로 많은 걸 보다보니 이 중 본 것을 소화하는 단계에서 무리가 생긴 거였죠. ‘처리가 안 된다’는 감각을 느끼는 날들이 쌓여 갔습니다. 이것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모델이라는 걸 언젠가는 인정해야 했습니다.
4.
지난 달, 부산의 한 숙소에서 부국제 특집 레터를 쓰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구독자(이자 실친)이 제게 “구독자와의 약속을 지켜야죠”라고 하더라고요. 콘텐츠 로그는 오후 11시경에 보내기 때문에 조금만 눙치다보면 곧 잠에 들 시간이 찾아옵니다. ‘오늘은 A하고 B한 이유 때문에 완성하기 어려울 것 같고, 내일 이 시간에 보내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정신이 또 번쩍 들더라고요. 영화에 대해 쓰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인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건 하나도 즐겁지 않고, 결국 그 날의 레터를 꾸역꾸역 다 쓰고 자정이 넘어서 발송 버튼을 눌렀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기에 대한 조정이 시급했습니다. 주 1회 발행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섰죠. 발행 빈도가 줄어들면서 두마리 토끼를 잡는 일도 자연스레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목요일에 보내드렸던 ‘못 다한 이야기’는 한두가지의 콘텐츠를 집중 리뷰하거나, 신규 테마를 잡아서 큐레이션 하는 성격의 레터로, 콘텐츠 제휴 제안을 줄곧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해부터 주 2회로 발행주기를 개편하면서 뉴스레터로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여지가 더 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광고주에게 가벼운 호흡의 이벤트와 깊이 있는 브랜디드 콘텐츠라는 두가지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됐고, 이 점이 광고주와의 더 풍부한 논의를 이끌어냈던 것도 사실입니다. 더 자주 보냈더니 더 많은 기회가 열렸습니다.
뉴스레터를 보내는 지난 몇 해간 ‘당신이 쓴 더 긴 글을 받아보고 싶다’와 ‘글이 길어서 다 안 읽게 된다’는 피드백을 꾸준히 번갈아 보게 됐습니다. 지엽적으로는 문단을 더 잘게 나누라는 의견과, 본문 앞 혹은 뒤에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요약을 덧붙여달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콘텐츠 로그를 면밀히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제가 그 모든 것들을 아주 보수적으로만 수용했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이 모든 소중한 건의사항들은 ‘적당한 가독성’이라는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모두에게 다르지 않을까요? 단락 중간에 삽입된 유튜브 콘텐츠에 있는 세모꼴의 재생 버튼은 여러분의 집중력을 흐트려 놓나요? 아니면 오히려 글을 읽다가 숨 쉴 구멍이 생겨서 전체적인 가독성에 도움이 되나요? 그럼 ‘적당한 분량’은 얼만큼이 되어야 적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텍스트가 너무 빨리 읽힌다는 건 구독자의 시간 낭비를 뜻하고, 비교적 느리게 읽힌다는 건 지적인 포만감을 전해줄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이런 물음표들에 자주 사로잡혀 있고는 했습니다. (실제로 ‘못다한 이야기’ 레터의 분량은 종종 1만자에 육박했는데, 분량까지도 톤 앤 매너를 좌우하는 다른 매체나 플랫폼들과는 달리 ‘저에게 주어진 독립적인 지면’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좋았습니다. 아무튼 뉴스레터는 제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물음표들이 많은 실질적인 문제를 비약적으로 뛰어 넘을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읽기’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디지털 환경에서 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느끼며, 동시에 끝까지 읽힐만한 글만 골라서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답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
앞으로는 매 주 월요일 11시에 한주동안 제가 본 콘텐츠들 중에서 제게 의미있게 느껴진 최대 7개의 콘텐츠를 소개하는 구성을 가져갈 예정입니다. 매일 하나씩 좋은 걸 발견했을 경우를 전제한 것인데 아무래도 매 번 7개가 되지는 않을 것 같고요. 뉴스레터에는 개별 콘텐츠에 대한 충실한 소개와 지금 이것을 고른 맥락을 더한 1000자 내외의 글이 수록됩니다.
그 맥락이란, 신예부터 거장까지 세상의 수많은 창작자 중에서도 지금 제가 꽂혀 있는 창작자, 산적해 있는 사회구조적 문제들 중에서도 지금 제가 주목하는 문제(와 그것을 정면으로 다룬 콘텐츠), 전략적 소비와 물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는 감상의 결과가 혼재되어 있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동시에 제 이야기가 저만의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도록, 전달 방식에 대한 고민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이 리듬을 최대한 지켜가고 싶습니다.
지난호가 큰 변화처럼 다가왔던 분들, 피드백 페이지를 통해 이런저런 말을 건네주신 분들, "왜?"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삼킨 분들, 혹은 변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고 싶었던 분들께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11.11.
ㅎㅇ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