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것들 1
안녕하세요. ㅎㅇ입니다. 저는 5월의 첫 날, 1박 2일 일정으로 제 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어요. 원래 영화제에 가면 적어도 2박을 하는데 출발 전부터 약간 무리해서 다녀온 일정이라는 걸 직감 했지만, 정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고 그만큼 영화관에서 맛있는 잠도 잤답니다. (오늘 레터에 꿀잠 무비 얘기도 있어요...) 오늘은 영화제에 머무른 첫 날 보았던 3편의 영화, 그리고 4월의 중순 즈음 보았던 또 다른 1편의 영화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최근에 좀 밀린 영화, 책, 드라마 얘기가 쌓여 있어서 전국제 일정이 끝나기 전, 다시 한 번 레터를 들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오늘의 레터를 시작합니다.
여는 말이 지난 호와 동일하게 발송되어 재발송을 합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바라며. 😭
01. #전국제 마지막 공화당원
02. #전국제 그랑 메종 파리
03. #전국제 하트 투 하트
04.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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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마지막 공화당원 (The Last Republ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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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시대에 우리 편이 아닌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2025년은 여력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보기 좋은 시기다. <마지막 공화당원>은 2021년 1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국회의 사당 폭동을 두고 트럼프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물은 미 공화당 의원 ‘애덤 킨징거(Adam Kinzinger)’의 여정을 쫓는 다큐멘터리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진보주의자 영화 감독 스티브 핑크가 그를 카메라로 담는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스티브 핑크는 관찰자에만 그치지 않고 카메라 바깥에서 애덤 킨징거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데, 가장 먼저 다른 감독이 아니고 자신의 제안에 응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당신은 <Hot Tub Time Machine>이라는 쿨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잖아요!” 스티브 핑크는 자신의 영화 팬임을 고백하는 이를 향해 깜빡이를 켜지 않고 다음 질문을 이어간다. 근데 너, 어쩌다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된거야? 그게 가능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는 사람은 용감하다. 물론, 정치인은 기존 입장을 철회하는 것만으로 박수 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덤 킨징거에게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미국의 민주주의자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그 공화당원의 각성은 보수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애덤 킨징거에 관한 밈을 생성하며 그의 존재 자체를 조롱했다. 그의 가족은 편지로, 전화로, 신변의 위협에 시달렸다. 잃은 게 있다면 얻은 것도 있다. 그건 스티브 핑크와의 우정이다. 짖궂은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친구의 탄생.
드물지만 가끔 일어나는 기적이다. <가짜 노동> 또한 정치적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쓴 책이다. 덴마크 뉴스 프로그램 제작진이 논쟁거리가 될만한 어느 논문을 두고 좌파 대표 패널로 아르네스를, 우파 대표 패널로 데니스를 섭외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일회성 만남으로 그칠 수 있었다. 나는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데니스가 아네르스에게 “그때 많이 배웠고 당신이 한 말 중 일부는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라며 불합리한 노동에 대해 같이 연구해보자는 메일을 보냈다는 썰을 정말 좋아한다. <가짜 노동>의 프롤로그는 이 영화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저자인 우리가 서로 다른 정치 진영 출신이라는 것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양쪽 다 오늘날 만연해 있는 불합리한 노동의 방식을 키우는 데 일익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타협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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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랑 메종 파리 (Grand Maiso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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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하자면, <마지막 공화당원>을 보면서 나는 조금 잤다.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218km 가량(이것은 우리 집부터 CGV 전주고사까지의 직선 거리다)을 이동한 뒤 아침 11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제의 요정이 옆에서 눈꺼풀의 무게의 무거움을 주제로 한 자장가를 부르는 게 들려온다. 나는 영화제 관객으로서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계획에는 없었지만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는 영화인 <그랑 메종 파리>를 급히 예매했다. <그랑 메종 파리>는 이번 전국제에 걸린 상영작 중 최고로 상업적인 영화라는 오명이 전해져오는 영화였다. 이 영화가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그랑 메종 도쿄>(2019)의 극장판이라는 점은 비교적 빠른 판단을 내려버리게 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의 집결체인 영화제에서까지 잘 아는 맛을 경험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1박 2일동안 최대한 신선한 맛을 먹고 싶었지만…… 그런 바람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잘 아는 맛도 잘 먹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미슐랭 3스타를 따기 위해 눈이 도라버린 셰프 역할을 하는 금발의 기무라 타쿠야를 볼 수 있다. 여기에 그와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캐릭터로 드라마 버전에는 없던 한국계 캐나다인 파티셰가 등장하는데, 그걸 다름 아닌 옥택연이 연기한다. 기무라 타쿠야가 불어와 일본어를 번갈아가며 주방에서 오더를 내리면 옥택연이 한국어로 답하는데(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이 주방은 알아서 다국어 호환이 된다는 설정이다), 여기서부터도 <그랑 메종 파리>는 오락물의 미덕을 충족한다. 극 후반부에 미슐랭 평가를 위한 코스 요리가 테이블에 펼쳐지는데, 조리부터 플레이팅을 거쳐 서빙까지 일련의 과정이 마치 액션 무비의 카체이싱 씬처럼 박진감이 넘친다. 영화의 메시지는 전통에 대한 존중 vs. 다양성을 포용한 재해석 사이의 갈등이다. 지금 요식업계 평단은 어느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줄까. <흑백요리사> 이후의 한국 관객은 이 영화의 결론에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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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하트 투 하트 (Heart to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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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투 하트>는 2006년 창단된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를 건조한 시선을 유지한 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다.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머금고 있다가 결국 끝까지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관객의 인식 개선을 돕고 싶다는 일념이 넘쳐 흘러 자칫 교조적으로 흐르는 것도,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건조한 시선. 보고싶은 영화의 태도가 이만큼이나 분명한 적이 있었던가. 단국대 산하의 단국뉴시네마연구소 재학생들이 다수 촬영에 참여했다는 이 영화는 지적 장애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무엇인지 정의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를 인생의 화두로 두고 연구를 거듭한 장애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실하게 보여주고 또 관객 역시 본 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트 투 하트>의 감독은 이어진 GV에서, 이 영화를 한창 촬영하던 시기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중이었는데 영화에 출연한 단원의 보호자 중 미디어에서 발달장애인을 미화하는 것을 두고 불편함을 표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 역시 발달장애인 가족으로서 최근 방영된 한드 중에서는 <일타 스캔들>이 당사자와 보호자가 경험하는 현실을 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라면 누구나 주어진 무대에서 프로페셔널하다. 이들은 전 세계 발달장애인 최초 뉴욕 카네기홀, 워싱턴 D.C. 존 F. 케네디 센터에서 무대를 서왔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이 영화에는 그들이 각자 실력 발휘를 하기 전 무대 아래에서 긴장을 다루는 법이 나온다. 거기에 별 다른 팁이 있는 건 아니다. 머리를 빗어주거나,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준비한대로만 하고 오라는 보호자(대부분 엄마)의 모습은 동생이 이직 면접 같은 걸 앞두고 있을 때 우리 집에서 종종 보아왔던 풍경의 일부였다. 나는 내게 그토록 익숙한 장면을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보았던 것이다. 긴장은 사실 당사자보다도 보호자가 더 한다. 아니다. 나는 ‘긴장’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동생과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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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남편의 죽음 이후, 4년만에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를 펴서 4월 20일에 새로운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중년 여성.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장면은 이쯤 되면 ‘일기’ 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묶는 건 크게 의미 없지 않나 싶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의 한 장면이다. 브리짓(르네 젤위거)의 전 회사 상사이자 구 남친 대니얼(휴 그랜트)은 이제 다른 여자들을 향해 ‘불길에 뛰어 드는 늙은 나방’이 되겠다고 말한다. 대니얼은 이 시리즈가 지속되는 지난 24년간 ‘매력적인 바람둥이’라는 형용모순적 수식어를 독점해왔는데 4편에서도 여전하다. 50대가 된 브리짓 존스는 여전히 대니얼의 스마트폰에 ‘핫 걸’이라 번호 저장이 되어있는 중이다. 휴 그랜트가 각본 작업에 참여 했고, 콜린 퍼스는 자기만의 방식대로 퇴장한다. 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에 더는 콜린 퍼스가 없다고? 과연 마크(콜린 퍼스)의 빈자리를 누가 채워줄 것인가.
물론, 2025년의 관객은 그 빈자리가 꼭 채워져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 브리짓이 어떤 남자와(얼마나 어린 남자와) 썸을 타는지가 하등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4편에서는 경력 단절 후 재취업을 하는 브리짓이 급히 베이비시터를 구하게 되는데, 그의 젊음이 브리짓에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갑자기 분위기 <서브스턴스>?) 크게 우려할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이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 이 시리즈가 펼쳐보인 진정한 ‘뉴 챕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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