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2 - 2025.06.08 / 말줄임표+유정천 가족, 매드 유니콘, 스탑 메이킹 센스
오랜만입니다. 예고 없이 3주간 휴재를 하고 맑은 안광을 장착해 다시금 인사를 드리고 있어요. 올해는 레터 제목에 주차수를 표기하고 있는데요. 지금은 한 해의 23주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직 29주가 남아 있으니 컵에 물이 반도 넘게 남은 셈이죠. 제게는 이 사실이 무척 힘이 됩니다. 긴 말 없이, 오늘의 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01. 모리미 도히미코 <유정천 가족>
02. 넷플릭스 <매드 유니콘>
03. <스탑 메이킹 센스> 40주년 헌정 앨범
04. M-net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 초반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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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정신ㅣ2024년 1월 2일 개정판 출간
다음주에 교토에 간다. 교토에 머무르게 될 나흘간 매일 비가 내릴 확률이 80%에 달할 것이라 예측되는 일기 예보는 나를 조금 심난하게 만들지만… 그 도시가 유월 중순에 장마 시즌인 걸 알고도 가는 것이다. 장마니까 비수기이며, 나는 사람이 적은 비수기에 여행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교토는 처음 가보는 것이기 때문에 요즘 나는 교토에 이미 다녀온 이들의 기록을 찾아 읽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다혜 작가는 <교토의 밤 산책자>(한겨레출판, 2019)에서 모리미 도히미코의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작가정신, 2022)를 보면 “1년 정도 교토에 살면서 밤의 골목길을 쏘다니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썼다. 그리고 자신이 주로 혼자 여행하며 알아왔던 교토는 시종일관 호젓하고 조용한 곳이었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밤의 본토초 골목을 동행인과 걸어본 날에는 그 도시가 그에게 그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얼굴을 보여주었다고, 그래서 ‘얼얼할 정도의 충격’을 느꼈다고 쓴다.
<교토의 밤 산책자>를 덮고나서 며칠 후 유튜브 <민음사TV>에서 론칭한 팟캐스트를 듣다가 모리미 도히미코라는 이름을 또 한 번 만났다. 민음사 편집자 동료로 만난 김화진/정기현 듀오가 진행하는 책 팟캐스트 <말줄임표>의 첫 화에서 이들은 두 사람 다 좋아해서 신나게 얘기해볼 수 있는 책을 골랐는데, 그 책이 바로 입에 좀처럼 제목이 잘 붙지 않는 <유정천 가족>이다. (나는 온라인 서점에서 확신을 가지고 ‘포청천 가족’을 검색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교토에 사는 요괴 너구리 가족으로, 주인공 너구리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으나 주인공 너구리의 작은 형은 너구리로 살 의욕이 없어서 도중에 개구리가 된다. 그러다가 위기 상황에는 전철로 둔갑하기도 하는데 동생들을 자기 몸에 태우고는 “승차감이 어떠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너구리가 아닌 인간들도 있는데, 이들은 송년회 때 너구리 전골을 해 먹는 작자들이다. 자신의 남편은 훌륭한 너구리였기 때문에 맛있는 전골이 됐다고 정신 승리를 해낸 강인한 어머니 너구리는 갑자기 더이상은 전골 냄비에 자식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며 운다…….
당장이라도 발에 닿을 것 같은 교토의 지명들이 언급되는 판타지 소설 <유정천 가족>을 읽다 보면 나도 얼얼해진다. 정기현 편집자는 <말줄임표>에서 모리미 도히미코를 “너무 내가 통통 튀게 쓰고 있나? 하고 한 번쯤 뒤를 돌아볼 법도 한데 절대 돌아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만 가는 기세 좋은 소설가”라고 소개했다. 또한, 모리미 도미히코는 자신의 출신지인 교토를 무대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이름 나 있는 일본의 중견 작가이기도 하다. <유정천 가족>은 작가가 애초에 3부작을 염두에 둔 너구리 시리즈다. 일본 현지에서는 2007년에 1부가, 2015년에 2부가 발표 됐는데, 아직 3부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튼, 이게 다 내가 장마에 교토를 가게 된 바람에 알게 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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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ㅣ2025년 5월 29일 공개
제 21대 대선일이었던 지난 6월 3일, 쿠팡이 처음으로 배송을 멈췄다. 덕분에 택배노동자의 참정권이 보장 됐는데, ‘연중무휴 로켓 배송’이 서비스의 근간이었던 쿠팡의 이런 결정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가를 대선일 전후 수상할 정도로 반복 보도 되는 뉴스를 보면서야 깨달았다. 쿠팡은 2024년 기준으로 국내 택배 시장 점유율이 37.6%에 달할만큼 온라인 쇼핑 업계에서 성장했지만, 그러는동안 전국민이 감당할 수 있는 ‘기다림의 감각’을 망가뜨렸다. 시스템은 우리가 기다릴 힘이 차오를 만큼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늘은 무신사가 ‘무배당발’(‘무신사는 무료배송 당일발송’의 줄임말) 서비스를 개시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비단 한국만의 일일까. 태국 택배회사들의 시장 점유율 싸움을 그린 <매드 유니콘>은 이처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자타의적으로) 훼손된 이들을 통해 완성되는 드라마다. 고향을 떠나 도시의 모래 채굴장에서 근근히 벌이를 하던 젊은 청년 ‘산티’는 본가의 엄마에게 선물을 부치려다 택배 기본 요금이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보다 더 비싸다는 것에 절망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그는 어느 대기업 CEO의 강연에 갔다가 감화되어,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거드름을 피우는 갑에게 이전보다 훨씬 비싼 값에 모래를 납품해 이윤을 남기는 경험을 한다. 이제부터 그는 모래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금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부칠 자유를 가질 것. 그리고 고객의 돈을 아끼게 해서 내가 아주 많은 돈을 벌 것. 젊은 산티의 야심을 알아 본 그 때 그 강연장의 CEO는 다시 만난 산티에게 고액의 “(사업 아이디어) 캐물음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고용한다. 알고보니 그건 취업 사기 비슷한 거였고 산티는 택배 회사의 혁신을 이루어 낼 자기 회사 ‘썬더 익스프레스’를 차리게 된다.
시원시원한 전개와 감각적인 연출 때문에 7부작이 짧게 느껴질 지경이다. 다만, 1화에서 산티가 취업 사기를 당하기 전에 온갖 더러운 꼴을 보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1화는 매우 비위생적이다. 그래도 견디고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가진 건 젊음 뿐인 산티가 믿을만한 동업자들을 만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은 잘하지만 매사 모든 일에 화가 나 있는(MAD) 천재 개발자, 남에게 빚지는 건 정신 나간(MAD) 일이라 여기면서도 예산 관리에 능한 재무 전문가, 그리고 산티는 함께 어디까지 해낼 것인가?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로 수천개의 택배가 접수되어 서비스가 마비 되었을 때, 그것이 경쟁사가 어그로를 끌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임을 알아챈 산티는 그 택배 상자들을 산처럼 높이 쌓아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린다. 그 장면은 썬더 익스프레스 전직원이 즐기는 한 여름밤의 파티처럼 극적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어그로가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택배가 내일 이 시간이면 바로 그 자리에 또 무시무시하게 쌓일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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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스탑 메이킹 센스> 40주년 헌정 앨범
‘Everyone's Getting Invol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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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24 Musicㅣ2024년 5월 17일 발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더이상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영화 상영 도중 전화 통화를 하고, 간식을 사러 나가고,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떠드는" 등 관객들의 매너없는 행동 때문이다. 188석짜리 영화관은 애초에 나 혼자 전세 내듯 보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문자 그대로 188명을 위한 곳이지만, 같은 공간을 두시간 가량 점유하면서 그야 말로 무작위하게 타인들을 겪다보면 가끔은 내 안의 말풍선이 피어오른다. 계속 그러실거면 집에서 보시면 안 되나요……? 제가 이 영화 VOD로 결제해드릴게……. 마틴 스콜세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거장 영화 감독의 결심과 <스탑 메이킹 센스>의 8월 국내 개봉을 예고하는 티저는 같은 날 나의 타임라인에 올라왔다. 이 영화는 <서브스턴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의 예술 영화를 수입, 배급하며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사 '찬란'의 수입작이다. 락 밴드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콘서트 실황을 다룬 1984년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창의적이면서도 생기 넘치고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로 채워져있다. 나는 여느때처럼 해외 댄서들의 퍼포먼스 영상을 뒤적거리던 어느 날 우연히 전설적인 라이브 영상을 통해 이 영화를 알게 됐다. 2023년 북미 제작사 'A24'는 이 영화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복원 후 재개봉 했는데 무려 700만 달러(한화 103억원)의 수익을 냈다. 외신은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관객이 3/4이었고, 관객의 60%는 1984년 첫 개봉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라고 분석했다. 나 또한 이 영화의 풀버전을 극장에서 처음 볼 예정인, 1984년에는 미처 태어나지 않았던 관객이 될 예정이다.
2024년에는 이 영화의 개봉 40주년을 기념하는 컴필레이션 앨범 [Everyone's Getting Involved: A Tribute to Talking Heads' Stop Making Sense]가 발매 됐다. 후배 아티스트들이 토킹 헤즈의 곡을 커버해서 싣은 것인데, 마일리 사일러스(Miley Cyrus), 린다 린다스(The Linda Lindas), 로드(Lorde) 등 참여진만 봐도 국밥 한그릇을 먹은 듯 든든하다. 토킹 헤즈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이 앨범 한장만 들어도 오는 8월에 극장에 가고 싶어질 거다. 그것이 토킹 헤즈 음악의 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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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M-net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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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HOOMㅣ2025년 5월 27일 - 7월 22일(예정)
"'춤'이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모인 스우파에는 유구한 경쟁 구도가 있습니다. 이전 시즌에서는 같은 크루에서 활동하다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된 허니제이-리헤이, 리아킴-미나명이 약자 지목 배틀부터 신경전을 벌이다 점점 갈등과 오해를 푸는 과정을 보여주었죠. 사제지간이었던 립제이-로잘린, 레드릭-하리무가 계급장을 떼고 댄서 대 댄서로서 맞붙는 장면들도 볼거리였고요.
이번 시즌의 경쟁 구도는 체급이 커졌습니다.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팀 오스트레일리아의 ‘에이지 스쿼드’와 팀 뉴질랜드의 ‘로얄 패밀리’ 간의 대결 때문인데요. 전자는 세계적인 안무가 패리스 고블이 세운 뉴질랜드의 댄스 크루, 로얄 패밀리의 기틀을 닦은 원년 멤버 케아야, 카이라, 루시베이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후자는 현재 로얄 패밀리에 소속되어 활동 중인 젊은 세대의 댄서들이고요.
그렇지만, Mnet의 꽃말을 ‘악마의 편집’이라 여기는 시청자들은 대결 구도에 놓인 이들의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언행에 집중한 편집을 더 이상 견뎌내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가 ‘전 세계 쎈 언니들의 자존심을 건 글로벌 춤 싸움’이라고는 해도, 관계가 어긋나거나 봉합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임하는 ‘춤(으로 하는) 싸움’에 있으니까요. 결국 두 크루는 ‘춤’으로 시청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관해 쓴 전문은 <뉴닉>에서 읽어보실 수 있어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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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wildwan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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