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에 읽은 5권의 소설
7월에는 한달 내내, 앞으로 절대 안 읽을 것 같은 책이나 다시는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추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고서점에 팔고 또 팔았고(균일가 1200원의 슬픔...) 그것도 아니면 노끈으로 묶어 과감하게 버리기도 했고요. 7월의 마지막날 이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서재 정리가 시급히 필요했습니다. 떠안고 있던 책들. 오늘의 레터에서는 올 상반기에 읽은 소설책 5권을 모아 소개합니다. 5권 모두 리디에서 운영하는 채널에 선공개 했던 리뷰 전문을 일부 다듬어서 싣습니다.
더불어 이 레터를 읽어주시는 출판사 담당자님들께 당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이사를 가게 되어 오는 8월부터는 주소지가 변경됩니다. 그러니, 광고 콘텐츠 검토용 책을 배송해주시기 전에 wildwan79@gmail.com 앞으로 먼저 메일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책을 무상으로 증정 받지 않고 있는데요. 저는 새로운 터전에서도 관심 가는 신간을 부지런히 사는 기쁨! 을 누리며 잘 살아보겠습니다. 😃)
01.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
02. 수확자
03.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04. 조이 럭 클럽
05. 맨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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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화진, 이희주, 박솔뫼, 정기현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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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밍꿀ㅣ2024년 6월 26일 출간
지난해 여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출간된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를 1년이 꼬박 지난 올 여름에서야 펼쳐보았다. 여름의 풍경이나 정서가 약간이라도 등장하는 네 편의 단편 소설이 끝나고 네 편의 짧은 에세이가 이어지는 구성으로, 재미있는 건 소설이든, 에세이든, 이 책에 담긴 것들은 마치 선크림을 꼼꼼히 펴 바르지 않아 요상한 무늬를 남기며 그을린 피부를 바라볼 때의 기분 비슷한 걸 안겨준다는 점이다. 건강미가 느껴지도록 열심을 기울인 결과인 태닝과는 정반대에 있는, 페이지를 넘기는동안 팔목과 목덜미에 꿉꿉하다 못해 소름이 오소소 돋는 순간들이 있다.
“혹시 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박솔뫼 「사랑하는 개」는 한국인에게는 88올림픽처럼 상징적인 시기로 남아있는 94년도의 여름을 소환한다. 유례 없던 폭염을 상징하던 1994년의 어느 날엔가 주인공 ‘나’는 “길가에 빛과 그림자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을 기억하고, ‘언제나 개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상대의 의뭉스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다.
“나. 여름, 계곡, 장마 같은 말은 아직도 못 써요”라며 귀엽고 엉뚱한 만화를 그리는 인물이 등장하는 김화진 「사랑의 신」이나, 여름방학에 할머니 집에 머무르는 소녀 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정기현 「검은 강에 둥실」은 비교적 순한 맛이다. 그 사이에는 땀 흘리며 끝까지 한 그릇을 비우게 되는 사천 요리 같은, 이희주 「탐정 이야기」가 끼어있다. 한여름에 홀홀히 동경으로 떠나 값싼 여성 전용 셰어하우스에 묵으며 이웃 여자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고 또 기이한 일을 겪는 주인공.
이희주는 「탐정 이야기」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몇 개의 좋은 여름과 나쁜 여름을 욱여넣은 상자” 같은 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이어지는 말은 앤솔로지 소설집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뚜껑을 열면 나쁜 것이 가장 먼저 튀어나오지만, 밑바닥엔 여전히 좋은 것이 남아 있는 그런 책. 여러분은 거기서 무얼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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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책들ㅣ2023년 2월 10일 출간
올해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저출산율 1위라는 통계를 듣고 심장이 차가워졌다. (응, 올해도 또 1위!) 그러던 중에, 인간들의 질병과 노화를 수준급으로 통제 및 관리할 수 있게 되면서 되려 인구 증가가 문젯거리가 된 미래를 그리는 이토록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을 읽게 됐다. ‘수확자(not math man)’는 마치 밀이나 보리를 거두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할당량만큼 다른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을 묘사할 때 절대 ‘죽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충분히 윤리적이지 않은 표현법이기 때문이다.
차기 수확자 후보로 간택 당한 10대 소년과 소녀가 완전히 다른 교습법을 가진 스승들을 만나는데, 그들을 스쳐간 스승 중 한 사람인 ‘패러데이’는 이런 일기를 쓴다. “내가 인류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망은 평화나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 모두의 내면도 조금씩 죽기만을 빈다. 공감의 고통만이 우리를 인간으로 유지시킬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그의 제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잘 ‘거두는’ 데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마인드 셋팅에 방해만 되는 걸까? 이 소설에서 가장 소름돋는 대사는 바로 이거였다. “효율은 연민을 위한 겁니다!”
이 소설은 2016년 현지에서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영상화를 위한 판권이 팔렸는데, 아마 투자자들은 <트와일라잇>, <헝거게임> 같은 게 나타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다, 2024년이 되서야 영화 대신 TV 드라마로 제작 방향을 틀었다는 새로운 계획이 발표됐다. 서사 속에서 사람을 수확하는 방식 자체가 단일하지 않고 수확자의 재량에 달려 있어, 영상화가 된다면 엄청나게 다채로운 CG를 보는 재미도 있을 테다(CG 작업하실 애니메이터 분들에게 미리 화이팅의 기운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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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비르지니 데팡트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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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채ㅣ2025년 3월 14일 출간
전자책 읽기의 장점은 특정 단어가 본문에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지 궁금할 때 바로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르지니 데팡트 소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주인공은 ‘개자식’을 몇 번 외쳤을까? 이 소설에는 A가 참을 수 없는 B를 지칭할 때와 어느덧 메타 인지가 된 B가 자기자신을 수식하는 표현을 포함해 ‘개자식’이라는 말이 총 21번 등장한다. (제목의 임팩트치고는 생각보다 본문에 적게 나온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이 이야기는 50대 여성 배우 ‘레베카’의 실물이 참담하게 느껴졌다는 40대 남성 작가 ‘오스카’의 얼평을 담은 인스타그램 포스팅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레베카가 오스카에게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제목을 달아 메일을 쓴다. 여기서 오스카는 쩨쩨한 네티즌처럼 글삭튀를 하지 않는다. 삭제만 하되 튀지는 않고, 대신 레베카에게 회신을 한다. 그러더니 자신은 사실 당신의 옛 동네 친구 아무개의 남동생이라는, 진작부터 나는 작가로서 당신이 등장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는, 최근 신작 소설을 발표했는데 동시에 미투에 휘말린 가해자가 되버렸다는, 묻지도 않은 썰들을 마구 늘어놓는다. 레베카 또한 이 타이밍에 못 본 체 하지 않고 오스카를 향한 답장을 이어 씀으로서, 이들의 이야기는 ‘서간문 소설’이라는 장르를 입는다.
두 사람 다 말이 정말 많은데 이들의 편지를 지켜보고 있던 내 기분을 정확히 묘사하는 대사 또한 소설 속에 있다. “심리주의 미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기분을 내내 느꼈습니다. 미친 듯이 신경을 긁는 끝없는 말다툼이었죠.” 오스카를 미투로 고발한 건 젊은 여성 홍보 담당자 ‘조에’로 그가 지긋지긋한 출판계를 떠나 자기만의 글을 쓰는 페미니즘 블로거로 활약하면서, 둘만 주고 받던 편지 위에 뭐만 썼다 하면 바이럴 되는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새로운 레이어가 더해진다. 조에는 오늘날의 SNS를 이렇게 정의한다. “공적 공간은 사냥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모두가 사냥에 나서지는 않지만, 모두가 사냥이 일어나는 걸 방치했습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아프다.
그러는동안 미투 고발을 당한 오스카의 신간 소설은 되려 날개 돋힌 듯 잘 팔리기 시작한다. 오스카는 인세로 잭팟이 터졌다고 말하며 조에에게 오히려 감사를 전하고 싶어한다. 아무래도 오스카는 ‘개자식’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변화하며, 그와 편지로든 대면 대화로든 말을 섞은 사람들 또한 조금씩 각자의 불화하던 삶과 화해 한다. 엔딩까지 가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얼마든지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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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녘ㅣ2024년 11월 11일 개정판 출간
지난 봄에 종영한 넷플릭스 두뇌 서바이벌 프로그램 <데블스 플랜 2>의 출연진이자 아시안-아메리칸 배우이자 다독가로 알려진 ‘저스틴 민’의 인생책 중 하나로 꼽힌 <조이 럭 클럽>. 산뜻한 분위기의 소설 제목은 역사적 혼란기였던 1940년대에 중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이민 온 후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빼던 이들이 모이는 한 판의 마작 게임장이자, 중국식 규칙이 통용되는 작은 세계를 뜻한다.
이 모임은 친정집에서 아주 향기로운 붉은 나무로 만들어진 마작 테이블을 챙겨온 ‘수위안 우’에 의해 시작 됐다. 그 시절 수위안과 이웃 여성들은 “뭐가 더 나쁜 일일까? 올바르게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나를 위해 행복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라는 질문을 서로 주고 받는다. 녹록지 않은 이민자 생활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찾고자, 일단 모임 이름부터 밝게 짓는다.
수위안 우의 딸인 ‘징메이 우’는 영어에 “조이 럭(joy luck)” 같은 말은 애초에 없다는 걸 안다. 중국인의 피가 몸에 흐르지만 태어나보니 미국이었고 미국 사람들과 상호작용 하며 자란 징메이는,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엄마의 과도한 기대와 낙관을 읽는다. 그 놀이판은 철저히 엄마 세대만의 유희다. 하지만, 엄마 수위안이 죽은 뒤 아빠는 딸 징메이에게 엄마 대신 조이 럭 클럽의 신규 멤버가 되어달라고 권한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너무 화려하고, 미국 파티에서 입기에는 너무 이상할 것 같은 옷”을 입은 마작 멤버들을 보며 징메이는 생각한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구먼. 거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아줌마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포옹이나 입맞춤이 아니라 뜨거운 김이 오르는 만두나 오리 모래집, 게 따위를 먹으라고 엄히 권함으로써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이다.
<조이 럭 클럽>은 마작 모임을 함께하던 엄마들, 그리고 모임 구성원은 아니지만 근황과 생존이 엄마들의 입을 통해 빠짐없이 전해지는 딸들의 시선을 서로 교차하면서 옴니버스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네 쌍의 모녀가 등장하는데 딸들은 번번히 엄마들을 실망시키고, 엄마들은 딸들을 향해 수준급으로 고압적이다. 그 갈등의 시간을 ‘재미(joy)’ 있게 회고하며 자신이 ‘운(luck)’이 좋은 사람이라고 결론내리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마작 테이블이 되기 전의 무엇. 아주 향기로운 붉은 나무에서 뻗어나온 잔뿌리들이 있다. 이 소설은 그걸 깨닫게 만든다. 그게 바로 우리 같은 딸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 안에도 분명 문법상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말, ‘조이 럭’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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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ㅣ2024년 10월 25일 출간
<맨투맨>의 주인공 '영호'는 제대로 된 영화를 찍어 본 적 없는 시나리오 작가다. 그의 각본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한 기획 개발 프로젝트에 선정된 적이 있다. 시나리오 제목은 ‘맨투맨’이지만, 거기에는 ‘초롱이’라는 골격 좋은 19세 여자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를 보기 좋게 배반하고 허를 찌르려는 의도가 다분히 전해지는데, 남성 시나리오 작가인 영호가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창작물을 작업해 지원 사업에서 가산점을 받아내는 일은 소설 속 세계에서든 현실에서든 가능하다.
그러나 그 후 투자자들의 피드백을 받은 우리의 초롱이는 너덜너덜 해진다. “근데요. 빌런 없이 초롱이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겠어요? 아, 초롱이가 골격이 좋은 바람에 우연히 종합격투기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고요? 이왕이면 빌런한테는 경기 승부 조작을 저지르는 역할을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투자자들은 자매가 국가대표 레슬러가 되어 그라운드를 누비는 <당갈> 같은 영화는 인도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떠한 피드백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손 놓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구원 투수가 될 지도 모를 여성 각색 작가 ‘김혜진’이 등장한다. 과연 이 시나리오는 진짜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영호의 선배는 말한다. “소설이 꼴 보기 싫어졌어. 세상의 모든 소설은 딱 둘로 나뉘는 것 같았지. 남에게 상처 주는 소설, 그게 아니면 자기가 받은 상처를 자랑하는 소설. (...) 그런데 후자의 소설도 결국은 자기가 받은 상처를 자랑함으로써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았어.”
'무해안온다정' 서사가 잘 팔리던 시기에 주목받은 시나리오는 관객을 만나기 전까지 어떤 목소리들에 두들겨 맞을까. 그렇게 시대의 요구를 수용해서 고치고 고치다 보면 그건 잘 팔리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서글픈 소설 <맨투맨>이 건네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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