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읽으며 떠오른 음악들 ㅡ
진행. ㅎㅇ
10일에 한 번씩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보내고, 격주로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에서 말한다. 최근 인생의 정수는 필라테스에서 배우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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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손님. 신지혜
기록하고, 경험을 나누고, 연결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 <뉴그라운드>의 공동 대표. 최근 인생의 정수는 케이팝에서 배우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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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0. "우아하고 강인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ㅎㅇ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보니 가머스가 60대에 쓴 데뷔작입니다. 그 전에 출판사로부터 98번 거절당했다고 하는데, 이력을 보면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조앤 롤링'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그러다 2020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이 소설의 원고가 출품됐는데, 엄청나게 큰 화제를 모으면서 누적 35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고 해요. 저는 올여름에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샘플북을 얻어서 이 책을 알게 됐어요. 샘플북의 분량이 150쪽 정도 되거든요. 근데 초반부 흡인력이 굉장한 소설이어서 이거 꼭 끝까지 봐야겠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총 두 권인 거예요. (웃음) 길어요. 하지만, 150쪽 정도 되는 지점에서 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가진 자신감을 보여주는 거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내년에 애플 TV+에서 8부작 드라마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만나볼 수 있는데, ‘브리 라슨'이 주연이자 총괄 프로듀서로서 참여 예정이라고 해요. 최근 출연작이 영화 <캡틴 마블>이었죠? 브리 라슨의 얼굴을 소설 속 주인공에 대입해서 읽어보니 더욱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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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2022, 다산북스)
ㅎㅇ 줄거리를 소개해볼게요. 극 중 시대적인 배경은 1950-60년대의 미국으로, 유능한 화학자이지만 종종 행정직원으로 오해받는 ‘엘리자베스 조트'가 주인공입니다. 이건 ‘여자가 과학을 진지하게 대할 리가 없다’ 라는 시대적 분위기가 파다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촉망받는 남성 화학자 ‘캘빈’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갑자기 엘리자베스는 연구소에서 해고당해요. 그 이후로 자기만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이어가면서 딸 ‘매들린’을 키우던 그는 어느 날 TV쇼 <6시 저녁 식사>의 진행 제안을 받게 돼요. 그 결과,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는 식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지혜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는 소설이라 재밌었어요. ‘유명한 TV쇼 진행자로서 사랑받는 스타가 된다고?’ 사실 읽기 전에는 화려하면서 뻔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1권에서는 1950년대에 일하는 여성이 조직에서 받는 대우가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TV쇼 진행자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2권의 내용도 제가 읽기에는 전혀 화려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중간중간 울컥하게 되는 부분들도 많았어요. 주로 엘리자베스가 다른 여성에게 하는 말들을 볼 때였는데요. 자신의 생각을 똑똑하게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하나도 화려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힘 있게 느껴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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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 두 가지 파트로 나누어 주인공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화학자로서의 엘리자베스는 캘빈과의 첫 만남에서 잘 드러나죠. 업계에서 잘 나가는 남성 화학자 캘빈이 이런 말을 해요. “지금 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요.” 내가 지금 너무 바쁘니까 말 걸지 말라는 거에요. 거기서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말하죠. “우연의 일치네요. 저도 중요한 일을 한답니다.”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정리하는 데에서 많은 게 드러나죠. 이어서 “여성 과학자를 몇 명이나 알고 있어요? 퀴리부인 빼고요.”라는 질문에 캘빈이 대답을 못 해요. 자신은 평소에 여성 과학자를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정작 자신이 이름을 아는 여성 과학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이 대화를 통해 캘빈이 살짝 각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미권에서 결혼한 여성의 경우, 자신의 성(last name)이 사라지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는데 그게 모든 공식 문서에 기재 되잖아요.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죠. 앞으로 자신이 화학자로서 하는 모든 일이 드러나지 않을 방법을 피하기 위해서요.
ㅎㅇ 다음으로는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엘리자베스인데요. 어쩌다 진행자로 발탁이 됐던 거죠?
지혜 초반부에, 엘리자베스가 딸 ‘매들린'의 영양상태를 의심하는 장면이 있어요. 정확한 화학적인 지식에 기반해서 저 나이대에 딱 맞는 영양소를 충족시키는 도시락을 정성껏 싸줬는데, 딸이 그만큼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 식으로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도 정말 과학자다운 전개였습니다. 알고 보니, 매들린의 유치원 친구가 계속 도시락을 뺏어 먹었던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소위 도시락 도둑의 학부모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그가 방송국 PD ‘윌터'였죠.
ㅎㅇ 윌터는 오후 4시 3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 신규 프로그램으로 한 방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러다 알게 된 엘리자베스를 향해, 요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안하게 되고요. 엘리자베스는 첫방부터 전문적인 화학 용어들을 많이 언급하죠. PD와 방송국 사람들은 ‘완전 망했다, 노잼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웬걸 전국의 여성 시청자들이 환호하는 거예요. 보면 볼수록 유능해진다는 기분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시청자가 있죠.
지혜 실제로 엘리자베스는 요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 점에 대해 진행자로서 진지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대로 얘기해요. 요리하는 여성들은 알 거잖아요. 직업적인 요리사가 아니더라도 한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맛있고 영양소가 충분한 걸 제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요. 그러니 시청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사회에서는 여성의 가사 노동을 중요하게 인정해주지 않지만, 엘리자베스는 그걸 인정해 준 사람이니까요. 기존 TV쇼 진행자와 아주 다른 분위기였더라도요.
이 책을 읽으면서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답게 계속 얘기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 모든 게 좋았어요. 아무도 나를 전문성이 있는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도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여성이 좌절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해나가는 게 현재 2022년을 사는 저에게도 힘이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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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엘리자베스와 그의 옆집 여성 해리엇의 첫만남이에요. 엘리자베스가 매들린을 낳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서 고생하고 있을 때 해리엇이 등장해요. 모른 척하고 엘리자베스 집에 와서 도움을 주는 거죠. 이때, 엘리자베스가 아이를 낳고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적어도 두 번은 들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비칠지 고민해요. 그런데 해리엇이 약간 우습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잖아요. “두 번? 정말 두 번밖에 안 들었어요? 그런 마음이 스무 번 든다 해도 절대 많은 게 아니에요.” 사실 둘은 엄청 다른 사람이에요. 해리엇은 그 시대가 원하는 가정주부의 역할을 다해내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좀 자제하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연대와 우정을 쌓아가고요.
저는 화사의 ‘i’m bad too’를 떠올렸어요. 마마무 앨범 프로듀싱을 함께하던 박우상 PD와 전체적으로 공동 작업한 화사의 첫 번째 솔로 앨범 수록곡인데요. 가사가 이런 식이에요. “나 지금 너무 안 좋아" / “너도?” “나도" / “괜찮아". 물론 이 노랫 속에서는 우린 다 젊으니까 괜찮아 라는 전제가 있어요. (웃음) 하지만 “네가 나쁘다고? 나도 나빠"라는 가사가 엘리자베스와 해리엇 두 사람의 대화와 겹쳐져요. 무척 흥겹고 신나는 곡이에요. 듣고 있다 보면 그래 다 괜찮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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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ㅇ 저는 이 소설을 ‘엘리자베스’가 요리를 설명하는 방식 즉, 그의 말에 주목하면서 읽었는데요.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식사>의 진행자인 엘리자베스는 “겉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졌어요” 라거나 “향이 굉장히 좋죠?” 같은 식으로는 말하지 않아요. 대신, 재료와 조리과정을 철저히 화학적인 접근으로만 바라보죠.
그런 식으로 요리를 설명하는 걸 보면서 레드벨벳의 ‘In & Out’을 떠올렸습니다. 이 노래는 제가 생각하는 케이팝 최고의 셰프송입니다. 요리 자체보다 요리하는 사람이 드러나거든요. 가사의 내용은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심리를 ‘도넛을 만드는 과정'에 빗대고 있고, 정말 많은 은유로 채워져 있어요. “step 1: mix it, step 2: bake it, step 3: serve it, then i taste it. (반죽을 섞어, 구워, 내어놓아, 쿠키를 먹어)”라는 가사가 귀에 꽂히죠. 또 중간에 초콜릿, 코코넛, 글레이징 아몬드, 민트칩, 아이싱 같은 재료 이름들도 언급이 되고요. 이 곡은 레드벨벳이 ‘The ReVe Festival’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한 페스티벌 3부작 중 마지막 앨범에 수록되어 있어요. 그 앨범에서 1번 트랙이 'Phycho'이고, 2번 트랙에 'In & Out'이 배치되어 있는데, 섬뜩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곡들이니 한 번 이어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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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시간: 52분
60대에 데뷔작을 발표해 2020년 프랑크프루트 국제 도서전을 뒤집어 놓으셨다는 '보니 가머스'의 소설이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화학이론 연구하기와 요리하기와 TV쇼 진행하기와 노젓기에 모두 전문성을 갖춘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 언니 하나만 잘해요.. 멋있어서 견딜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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