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래빗홀ㅣ2025년 8월 27일 출간
김초엽 작가가 4년 만에 소설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소설집에는 벌에 쏘이고 싶다(<고요와 소란>)거나, 녹슬고 싶다(<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기벽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수중에서는 기억을 잃은 돌고래가 온갖 종류의 소문을 찾아다니고(<소금물 주파수>), 양봉업자와 곤충학자는 “대체 뭘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찾아 세계 곳곳을 들쑤시는 두 여자”(<달고 미지근한 슬픔>)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 같은 걸 욕망하고 정처 없이 이동한다.
오늘은 김초엽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에 실린 단편소설 중 표제작 ‘앙면의 조개껍데기’와 가장 좋았던 ‘비구름을 따라서’를 소개한다.
수록작 ¹ <양면의 조개껍데기>
28세 여성 샐리는 나의 조금 다른 면이라고 생각했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중이다. 샐리는 진료 초반에 “각각 따로 이름이 있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의사로부터 받는데, 그 지구인 의사는 ‘자아’뿐 아니라 ‘타자아’와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샐리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다. 샐리는 인간이 아닌 ‘셀븐인’인데 셀븐인들은 수중 압력을 잘 버텨내기에 오래 잠수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지구인들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그래서, 샐리는 외딴 행성의 루피너스 심해를 촬영하고 싶어 하는 해양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 일하기에 적격이다. 그리고 일터에서 만난 다큐멘터리 감독과 사랑에 빠진다.
지구인과 셀븐인. 이종간의 사랑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다자연애다. 그런데 이제 다자연애인데 몸은 두 개인. 그런데 이제 또 삼자대면을 하는 순간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감정의 화살표는 복잡해진다. 감독은 샐리의 두 자아에 ‘라임’과 ‘레몬’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그 둘 모두와 사랑을 주고받는다. 레몬과 라임은 감각을 함께 공유하는 사이이므로 감독이 나 아닌 쟤한테 주는 다정한 시선을 느끼고, 갓 사랑에 빠진 쟤가 느끼는 감정적 여파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래서 작중 화자인 ‘라임’은 생각한다. 우리 분리되자! 복잡하고 비싸더라도 의료적 도움을 받자! 이렇게 계속 연루돼서 살지는 말자! 우리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삶이 어떤 건지 좀 느껴보자고!
로맨스라는 새로운 이벤트가 끼어들자 이 삶이 불편함투성이로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게 옳은 건지도 생각해볼 문제였다.”고 레몬이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감정과 감각의 풍파가 있다. 그냥 마음을 맡기고 파도를 타면 된다.
수록작 ² <비구름을 따라서>
평소 보드게임을 즐겼고, 게임으로 알게 된 친구와 살게 됐고, 놀이공원에서 캐스트로 일하며 폐품 처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여자가 사고사로 사망하면 그를 기리는 자리에는 누가 올까? ‘비구름을 따라서’는 보드게임 개발자, 아르바이트 동료, 최근까지 그와 함께 살던 룸메이트이자 주인공이 고인으로부터 의문의 추도식 초대장을 받고 모이면서 시작된다.
현실에 없는 물건을 만들고 그 쓰임새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말로 설득시켜야 점수를 얻는 보드게임 ‘노바 파우치’를 소재로 한 이 소설에는 현실에서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아주 많이 나온다. 나는 며칠 전에도 우산을 버스에 두고 내렸고, 음악을 NPC를 태그해서 듣도록 인형으로 만들어진 샤이니 앨범 ‘키링’은 길을 걷다가 끊어져버렸다. 게다가 잃어버린 ‘머리끈’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분명 평행세계 어딘가에 있을 거다…. 아무튼, 독자에게 낯선 게임인 ‘노바 파우치’의 법칙을 이해시키기 위한 첫 라운드의 제시어는 “그물망처럼 구멍 뚫린 우산”이다. 그런 걸 도대체 어디에 쓸 수 있을까? 플레이어들은 쓸모없으므로 당장 폐품처리장으로 보내도 무방할 듯한 물건들에 알맞은 자리를 찾아준다.
재미있는 건 주인공이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룸메이트와 사는 어려움에 대해 묘사한 지점이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현실에 발닿지 않은 허구의 세계에 대해 말할 때만 눈이 빛난다거나, 가끔 어떤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롭다는 표정을 짓거나, (모든 소설 독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방에 잡동사니가 쓰레기장처럼 쌓이는 걸 보면 룸메이트로서는 갑갑해진다. 그리고 ‘삼투현상’, ‘반투막’을 넘어온 사물들이 등장할 때 나는 새삼 김초엽 작가의 전공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부터 꾸준히 따라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작가가 이과적 지식으로 독자를 압살시킬 생각이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소설 속 인물도 평행 세계를 넘나드는 반투막이라는 개념을 접하고서 반투막의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묻는 것이다. “사람이 양말이나 머리끈 따위보다는 훨씬 크지만, (...) 인간이 그걸 못 지날 만큼 크겠어요?” 그는 현실이 아닌 곳으로 가고 싶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현실은 나를 구원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도 소설 속 세계로 도피를 하는 게 아니던가.
시간여행, 평행세계 같은 SF의 인기 테마들을 선뜻 다루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김초엽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그 테마를 깊이 파고든 훌륭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차별화되는 이야기를 구상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소설가로 데뷔 이후 처음 써본 평행세계 이야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보드게임이라는 소재를 더하니 집필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과연 페이지를 넘기는 데 가장 가속도가 붙었던 단편이기도 하다.
* 《양면의 조개껍데기》 출간 기념 무크지,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