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5 - 2025.09.07 / 즐거운 나의 집, 거기 눈을 심어라, 케이팝드
제82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짐 자무쉬가 연출하고 각본을 쓴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가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으로 열어본 월요일입니다. 내일(9월 9일 화요일)은 이 작품이 국내 최초로 상영되는 올 부산국제영화제 티켓팅이 열리는 날인데요. 부디, 제발, 원기옥을 모아 이번만큼은 티켓팅 서버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봅니다.
사실 제가 가장 기다리고 있는 행사는 돌아오는 일요일에 열리는 제77회 에미상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으로 데뷔한 오웬 쿠퍼가 역대 최연소 남자조연상 후보로 오른 건 물론이고, 제가 좋아하는 애플 TV+ 시리즈 <세브란스: 단절>이 무려 27부문 후보에 올랐거든요. 온갖 시상식들로 채워진 가을의 한 복판에서, 오늘의 레터를 시작합니다.
01. 이윤석, 김정민 《즐거운 남의 집》
02. M. 리오나 고댕 《거기 눈을 심어라》
03. 애플TV+ <케이팝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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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북스ㅣ2024년 2월 20일 출간
요즘의 나의 왼쪽 더듬이는 5주째 살고 있는 집에, 오른쪽 더듬이는 4주째 하고 있는 알바를 향해 뻗어 있다. 왼쪽 더듬이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면, 청소 고수님을 불러 다용도실의 곰팡이 청소를 하고, 청소하는 틈에 다용도실의 호스가 빠져 물 폭탄이 되어 세탁기 A/S를 부르고, 용달 기사님과 둘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을 오르며 가구를 옮기고, 문고리를 셀프로 갈다가 빈 문고리에 고여있다 날리는 톱밥을 먹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가 성실하게 흐르면서 모든 게 새로이 재편된 와중에 각성 상태가 지속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야 이케아에서 산 흔들 의자에 앉아 빨래를 돌리며 작년 언젠가 사 두었던 집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 있는 걸 보면 조금은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90년대생 건축가이자 전 직장동료인 이윤석, 김정민은 지금 각자 살고 있는 집의 세입자이기까지해서 그런 정체성들을 포개서 《즐거운 남의 집》을 함께 썼다. 두 저자의 주거 역사를 합쳐보면 원룸, 고시원, 다섯 명이 같이 살았던 쓰리룸, 회사에서 따릉이로 10분 걸리는 집, 심지어 해외의 집까지 다채로운데, 그들은 왜 남의 집 얘기를 하는가? 생각해보면 심플하다. ‘자가’가 아닌 바에야 우린 다 ‘남의 집’에 살고 있는 거고 물론 자가면 조금 더 신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 제목을 한 번 더 외쳐본다. 즐거운 남의 집! 와 즐겁다!
“집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다. 그러나 줄곧 그것들을 피하려 노력해 왔다. 그 많은 이야기 중 내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집에는 중간이 없었다.” 라는 프롤로그처럼, 이 책은 어떤 중간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중간은 평균이고, 무난한 것이며, 그게 한국의 주거 문제에서는 어쩌면 제일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 아니냐는 반문이 들지도 모르지만, 공간을 채운 취향 전시도 아닌 빠져 나가는 카드값 앞에서 하염없이 궁색해지는 얘기도 아닌 중간이란 이런 것들이다.
- “나는 지금까지 주거 공간을 공유했던 모든 사람과 싸우고 말았다.”(p.193) 나도 그렇다. 20대 때 주거 공간을 쉐어했던 그 누구와도 현재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 “옛날부터 형광등은 눈치가 너무 없었다. 눈치 없는데 열심인 스타일이었다.”(p.136) 그래서 나도 집에 혼자 있을 때는 형광등을 켜지 않는다.
- “안녕하세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주택도시공사 선생님들. (...) 청년들을 위한 행복주택 맞죠? 순간 주민등록증을 부리나케 찾아봤지 뭐예요. 저는 제가 청년이 아닌 줄 알았다니까요.”(p.125) ㅠ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올 여름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거쳐 새로운 남의 집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사업자이자 미혼 세대주로서 사실상 시스템의 혜택은 거의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정착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모르더라도, 비단 주거가 아니더라도 삶 대부분의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불안도가 낮은 성향 덕에 과도기를 어떻게든 통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며, 사실 이제는 이런 시기에 과도기라는 심상한 이름을 붙이는 것 마저도 재고해봐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요즘은 하루 걸러 집 앞 홍제천을 길게 걷거나 따릉이로 완만한 내리막길을 달릴 때마다 생각한다. 나도 《즐거운 남의 집》의 저자들이 말하는 즐거움이 뭔지 알 것 같다고. 즐겁지 않은 순간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에는 확실한 즐거움이 마련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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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M. 리오나 고댕 《거기 눈을 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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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비ㅣ2022년 12월 19일 출간
7월부터 트레바리에서 ‘더 인간적인 케이팝’을 주제로 함께 책을 읽고 있다. 보여지는 것, 이를테면 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케이팝 얘기를 하기 위해 8월에 《바디올로지》를 읽었고, 9월의 책으로 시각장애인 작가가 ‘봄’과 ‘눈 멂’에 대해 대중문화 콘텐츠를 경유해서 살펴보는 《거기 눈을 심어라》를 연달아 읽는 경험은 나름의 전복을 꾀하는 설계였지만, 솔직히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독서였음을 인정한다. (이 책은 님이 골랐잖아요….) 나는 이 두 책을 연달아 읽으면 케이팝을 보.는. 일에 대한 균형 감각이 생길 거라고 막연히 예상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아예 다른 차원의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바디올로지》를 읽고나서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자기관리로 점철된 외형적 이데아를 향해 내가 얼마나 너그러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은 반면, 《거기 눈을 심어라》는 ‘네가 케이팝에서 뭘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처럼 전제 자체를 부수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케이팝 주변에서 ‘미감’과 ‘감다살’이라는 감각 중심주의적 용어가 사라지려면, 그런 비주얼에 치우친 평가에 대한 자정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여기서 전제는 케이팝에서 시각적 요소를 감상하거나 평가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경쟁적으로 특정 감각을 추구하지 않는 방식의 감상이 가능한가?’ 에 더 가깝다. (물론, 여기서 케이팝을 청각중심주의적으로 감상하는 건 온당하냐 라는 질문이 또 나올 수도 있겠지만….)
올 여름에는 “음악으로 승부보는 거 좋죠. 근데 다른 거 다 구린데 ‘음악’으로만 승부보는 건 아이돌판에서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아십니까” 라는 트윗을 보았다. 이 말에 내가 동의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의 '바보 같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앨범 사양이 공개되는 순간, 그것이 단순히 동그란 CD가 네모곽에 담겨 있는게 아니라 세상에 없던 포맷의 앨범(Ex: 가방, 칵테일잔, 다마고치 기계…)을 하고 있다면 왜 모니터 너머의 팬에게는 자부심이 차오르는가? 동시에 왜 나는 과잉 된 감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만 하는 동종 업계인들의 긴장을 감지하고 마는 걸까?
《거기 눈을 심어라》의 저자가 언급한 다른 시각장애인들의 저서 혹은 에피소드 중에 ‘헐’이라는 사람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중세 수녀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그는 매일 할 일이 끝나면 혼자서 수도원을 둘러봤는데, 그 중 대리석 제단을 발견하고 매일 밤 조금씩 조금씩 그 재단을 살폈다는 것이다. 윗면을 쓰다듬다가 반들거리는 표면과 거칠게 꺼진 자리를 쓰다듬어보고 심지어는 살짝 혀로 핥아보는 그러한 대리석 감상 방식을 그는 ‘온몸으로 보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예시는, 책의 후반부로 가면 시각장애인 ‘레이’가 보름달 이후의 달 모양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해 묻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시각장애인 ‘찰스’가 이렇게 답하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당신들 모두 시력이 완벽한데도 달을 보지도 못하는군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저자의 선고는 많은 것을 보지만 거의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나를 겨냥하고 있다. “비시각장애인은 생각만큼 눈을 사용하지 않으며, 하다못해 그만큼 어휘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p.355)
그나저나 달 얘기가 나와서말인데…… 오늘(9월 8일) 새벽에 내가 쿨쿨 자는동안 개기월식을 기념하며 엑소 완전체 티저가 공개 됐다…. 정말 케이팝 세상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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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le tv+ㅣ2025년 8월 29일 공개
*<한겨레21> 1578호에 실린 '케이팝 향만 내고 사라진 무대' 칼럼 전문입니다.
“제 손주들은 케이팝 팬이지만 할머니가 케이팝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이걸 알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애플TV+ 경연 프로그램 <케이팝드(Kpopped)>에서 미국 소울 음악의 거장 패티 라벨이 들려준 이 말은 케이팝이 세대를 통합하는 언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유일한 공통 분모가 케이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패티 라벨이 누구인가. 그는 국내에서 “키치키치 야야 노래”로도 잘 알려진 ‘레이디 마멀레이드’의 원곡자로, 1974년도에 발표된 이 곡을 4년 차 케이팝 걸그룹 빌리와 함께 부르는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유튜브 역사상 최초의 10억 뷰를 달성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13년이 흘렀다. 뉴요커 칼럼니스트인 콜린 마샬은 《한국 요약 금지》에서 이 곡이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농담 같은 내용을 음악에 담아 성공했다”라며 놀라워했지만, 전 세계 사람들은 노랫말에 담긴 아이러니함을 100%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강남스타일에 열광했다. 이렇듯, 케이팝 홍보 대사가 된 싸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 될 수 없을 테지만, 그런데도 2025년의 <케이팝드>에서 또 다시 강남스타일의 멜로디가 흐를 때면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케이팝이 뭔데요?
세기의 팝송에 케이팝 스타일을 가미해 재해석해서 겨룬다는 프로그램의 콘셉트를 보면, 재해석의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게 <케이팝드>의 정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곡 주인은 무대에 오르기 전 ‘케이팝스럽게’ 편곡된 음원을 듣는다. 그러나 편곡의 의도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 부재하므로 케이팝 풍의 명곡을 듣는 이들은 순식간에 ‘느낌의 공동체’로 묶여버리고 만다.
이 프로그램이 케이팝의 윤곽을 더듬어가는 중에도 한없이 케이팝 스러운 지점이 있다면, 그건 참가자들이 48시간 내에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걸스플래닛 999: 소녀대전>과 <프로듀스 101 재팬>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각각 팀을 결성한 케플러, JO1에게는 익숙할 속도감이다. 여기서 원곡의 주인은 케이팝 아티스트와의 합동 무대를 위해 제작된 안무와 동선을 꼼꼼히 숙지해야 하면서 난감해진다. 경연에 참여한 팝스타 매건 더 스탤리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가볍게 놀러 온 ‘댄스파티’가 아닌 ‘훈련소’가 된다.
8부작이 진행되는 동안 변주 없이 동일한 포맷이 반복된다. 적게는 4인조 걸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부터 최대 11인조 보이그룹 JO1가 등장할 때 관객석에서는 “SPLIT!(나누어져라!)” 구호가 호명되고 그때 무대가 양쪽으로 분리되는데, 경연을 마치고 나면 그들은 다시 한 팀으로 모여 자신들의 히트곡 무대를 선보인다. 다인원 그룹은 케이팝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정체성으로, 유닛일 때는 완전체일 때와 다른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정교한 전략이 구사된다. 그러나 <케이팝드>에서는 팀이 이렇게 쪼개져야 하는 이유 즉, 유닛으로서의 설득력부터 부족하다. 다시 한 팀이 된 이들은 수많은 연습을 거쳐 손발의 각도와 정렬까지 맞춘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이건 분명 우리가 아는 케이팝의 맛이다.
<케이팝드>는 ‘케이팝스러움’을 은은한 방향제처럼 분사하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케이팝 그룹과 협업한 해외 아티스트들에 의해 표현되는 케이팝의 위상과 현주소는 한없이 모호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케이팝의 뜨거운 인기를 수용하였으나 제 안에 처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세련되게 숨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곡이 재해석되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팝드>는 끝까지 우리 손에 케이팝을 쥐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케이팝인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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