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렬적 소비와 현대 사회
🔖 어제 부로 디즈니 플러스가 국내에 런칭 되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지금 디즈니 플러스에 접속한다면 나는 망할 것이다'라며 아직 멤버십에 가입도 하지 못한 채로 있습니다. 오늘은 2021년 연초에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때 써두었던 글 한 편을 꺼내보았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요.
아빠는 전집을 사주는 부류의 어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글을 익히는 낱말카드의 ㅊ에 있을 것 같은 단어들을 대화 중에 자주 흘렸다. 그건 "책 좀 읽어라"는 아니었다. 대신, "책을 눕혀놓지 말고 책등이 잘 보이게 꽂아 두렴." 또는 "책날개를 중간에 끼워 넣지 말아라. 세상에 책갈피라는 게 왜 있겠니." 같은 말들이었다. 또래들이 '책꽂이에 꽂혀있으면 보이는 그것', '표지를 넘기자마자 바로 보이는 그것' 하고 표현했던 것들을 유년기의 나는 조금 더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볼 수 있었다. 크게 쓸모있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어린이를 위해 어떤 부모는 무턱대로 전집을 사들이기도 한다는 걸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아이가 친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책에 둘러싸인 환경을 일단 조성해두고 보려는 것이다. 책이 나무를 베어서 만드는 거니까 이건 유사 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만드는 거라 볼 수 있다. 그런 어른들은 넓은 마당이나 정원을 가진 집에 살지 못하더라도 유사 수목원장 노릇을 한다.
가장 오랜 기억 속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책은 주니어김영사에서 펴낸 <앗,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 시리즈였다. 과학 뿐 아니라, 사회, 역사까지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 150권짜리 전집인데 당시 '어떻게 이렇게 제목을 잘 지었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제목을 속으로 따라 읽은 순간부터 책 표지를 당장 넘겨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리가 물렁물렁>을 보면 과학에 아무 관심없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물러지는 것 같았고, <벌레가 벌렁벌렁>을 보면 왠지 실감나게 무서워졌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우주가 우왕좌왕>, <수학이 수군수군>, <진화가 진짜진짜> 식으로 두운을 이용한 형용사를 써서 어린이 독자로 하여금 낯선 분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시리즈를 읽는 방식은 이걸 조금 읽었다, 저걸 조금 읽었다 하는 식이었다. 한 권을 끝까지 보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건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감각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게는 병렬적인 콘텐츠 소비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기억이다.
그 후로도 늘 그런 식이었다. 조금씩 나누어서 여러가지를 동시에 읽고, 보고, 듣는 식으로 지냈다. 그리고 모두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했다. 유명인사의 인터뷰에는 '당신의 인생작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누구도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 없지만, 인생작에 대한 답변을 듣고 나면 그 사람의 인생을 적당히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번 접전을 거듭한 후보를 추려보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다. 대답을 해버리는 순간 그 작품을 기점으로 나와 내 인생이 거기에 고정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살다보면 인생작은 업데이트 될 수 있지만, 잦은 수정은 신뢰를 잃는 지름길이니까. 나는 자꾸 말을 바꾸고 싶지 않았고 한 군데에 깃발을 꽂는 것 보다는 청기 올려 백기 내려를 반복하는게 더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을 뒤흔든 작품이 하나일 리가 없다.
그러나 그건 바꾸어 말하면 주의력이 결핍되고 파편화된 것,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 무언가를 내 것으로 소화하는 시간이 부재한 것, 몰입력이 약한데다가 여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 하나라도 정확하고 단단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과제를,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랬다. 일의 시작은 자료 조사부터인데 나는 조금씩 모든 자료를 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모든 자료를 본다는 말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집에서 영화를 보다 말고 팟캐스트를 듣고, 온라인 서점에 책을 주문하러 접속했다가 아직 안 읽은 책을 들춰보고, 그 사이에 어제 내가 주문한 책이 도착해서 열어 보다가 택배상자가 몇칸이나 쌓인 걸 보고는 청소용 음악을 재생시키며 집을 치우기 시작하고, 청소를 다 끝내지 못하고 또 드라마 에피소드를 틀기 시작하는데, 머리맡에 있는 모든 책에는 책갈피가 끼워져 있고,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는 ‘보시던 데부터 재생하시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건네온다. 마저 넘겨야 할 페이지와, 마저 내려야 할 스크롤과, 마저 눌러야 할 재생버튼 사이에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항구적인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건 마치 나를 위한 진단처럼 들렸다. 나는 내가 마주하는 것들에 대해 결코 위대하고 항구적인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재미있는 것과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 사이에서, 혹은 지금 필요한 것과 어쩐지 필요해보이는 것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 갖는 것이 아쉽다. 그라운드를 발로 뛰는 선수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지원자도 아니지만, 나의 일상에서도 매일같이 대진운이 벌어진다. 그리고 대진운의 세계에서 다음은 없다. 오늘 못 보면 다음에 보면 될 거라 여기고 넘어가지만, 그런 다음은 없다. 가끔가다 뒤를 돌아보면 그렇게 영원히 쌓여간 '다음 기회에'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다.
얕은 주의력에 대해 걱정하며 지낸다는건, 집중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이면서도 동시에 나처럼 산만한 이들의 고충을 담은 이야기에 끌린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은 나아지지 않는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일관적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나는 집중력을 통제해서 눈앞에 놓인 한가지를 끝장내버리고 싶지만, 동시에 희미한 주의력을 가지고도 어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를 해냈다는 데에서 더 자주 기쁨을 느낀다.
이런 나와는 달리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진행형의 재미에 머무를 줄 안다. 지금 할 수 있는만큼 해석하고 소화하고 음미한다. 자신의 속도에 맞게 콘텐츠와 관계 맺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속도라는 건 무엇일까. 현대사회의 바쁘고 빠른 속도감 때문에 나까지 정신없이 휩쓸려버린 것이라 탓하고 싶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만일,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온 채로 호젓한 호숫가가 내다 보이는 통나무집에 도착했다면? 나는 절대 호젓한 채로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보고 듣고 읽어야할 것들의 리스트를 사뭇 불안한 표정으로 적어내려 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져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아니다.